교향곡 1번의 참담한 실패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작곡 일선에서 물러났다. 마침 불세출의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과 가까워진 그는 1898년 9월 흑해 연안의 아름다운 도시 얄타에서 가곡 연주회를 열었는데, 공연이 끝난 뒤 누군가가 찾아왔다. 작가 안톤 체호프였다. “젊은 친구, 나는 그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어요. 이제 그대의 얼굴을 직접 보니 장차 큰 인물이 되실 분인 걸 잘 알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격려의 말에 스물다섯의 청년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 같았다. 따뜻한 감화를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훗날 체호프를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꼽는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죽는 날까지 나는 그의 말을 기쁘게 간직할 거야.”
체호프의 말은 라흐마니노프의 가슴 속에 살아 있었다. 수십 년 뒤 그는 고향을 등지고 살아가는 망명객이 되었고, 가장 영향력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젊어서는 작품의 성공과 연주자로서의 야심이 더 중요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스타 피아니스트라는 지위는 체호프 소설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친구 예술가들, 나약하지만 꿈꾸는 사랑스러운 사람들, 자신처럼 고향 잃은 망명자들을 돕는 수단일 뿐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모놀로그에 대한 가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쉴 거예요! 우리는 천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을 채운 영롱한 별빛들을 볼 거예요. 지상의 모든 악이, 우리의 모든 고통이 자비의 바닷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그 자비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볼 거예요. 우리의 삶은 고요하고, 부드럽고, 애무처럼 달콤하게 될 거예요. 난 믿어요. 믿어요….” 라흐마니노프도 음악으로 수많은 바냐 아저씨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체호프에게 진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