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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칼럼] 성장보다 물가

중앙일보

2026.04.20 08:20 2026.04.2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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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주필

고현곤 주필

오일쇼크 1차(1973년)와 2차(79년) 때 우리의 대응이 크게 달랐다. 1차 때는 박정희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물가를 찍어누르는 방식을 썼다. 정부 내에서 “물가는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이 앉아있을 때 하나하나 때려잡아야 한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다. 하지만 가격 통제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권 시절인데도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74년 24%, 75년 25% 급등했다.

1차 오일쇼크때 경기 부양하다 위기
2차때 긴축 선회, 30년 인플레 탈출
지금 ‘돈 풀며 가격 통제’…1차 비슷
성장해도 물가 못 잡으면 다 잃어

결정적 패착은 74년 후반 물가 안정에서 경기 부양으로 선회한 것이다. 성급한 결정이었다.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유신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국민에게 떡을 주는 게 필요했다. 고도성장에 집착했다. 국민은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부족한 돈은 한국은행이 찍어서 충당했다. 정부 빚이 늘었다.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됐다. 중동 건설에서 벌어들인 오일머니가 더해지면서 70년대 후반 시중 통화량이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집값과 주가가 치솟으며 거품을 키우다 2차 쇼크를 맞았다. 1차보다 충격이 컸다.

정부는 2차 때 다른 선택을 했다. 신현확 당시 부총리 등 경제관료가 안정화 시책을 밀어붙였다. 건국 이후 30여 년 간 성장 정책을 뒤집는 혁명 같은 사건이었다. 돈줄을 조였고, 예산 씀씀이를 줄였다. 임금 인상도 억제했다. 인기 없고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정책이었다. 전두환 정부도 긴축을 이어갔다. 물가상승률이 83년 3.4%까지 내려갔다. 긴축의 고통을 감내한 끝에 30년 인플레이션에서 탈출한 것이다. 이때의 물가 안정이 80년대 말 3고 호황의 밑거름이 됐다.

2차 때도 경기 부양과 성장에 매달렸으면 동북아의 천덕꾸러기로 남을 뻔했다. 중남미는 1, 2차 때 계속 포퓰리즘 돈 풀기를 하다가 80년대 외채 위기를 겪었다. 국가 부도와 좌경화를 반복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적 혼란과 고물가를 겪고 있다. 일본과 대만은 1차 때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긴축과 안정을 택했다. 덕분에 일본은 80년대 세계 2위 경제대국에 올랐다. 당시 대만도 우리보다 10년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란전쟁이 3차 오일쇼크를 촉발했다. 전쟁이 끝나도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이 나온다. “카타르만 해도 천연가스 시설 17%가 파괴됐다. 복구하는데 3~5년 걸릴 것.”(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전쟁이 일단락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 위협을 재개할 게 틀림없다. 전쟁 때 서운했던 국가에 갖가지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다. 물가 상승과 성장 둔화가 불가피하다.

우리는 다시 성장이냐, 물가냐의 갈림길에 섰다. 자신감 넘치는 이재명 정부는 둘 다 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경기는 돈을 풀어 부양하고, 물가는 행정력을 동원해 잡는 식이다. 1차 때 그렇게 하다가 둘 다 놓치고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다. 실용주의가 땜질식 처방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해선 안 된다. 이번처럼 원자재값 급등으로 인한 비용 상승(cost push) 인플레이션은 특효약이 없다. 수요를 줄이고 과잉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정공법으로 풀어야 한다.

가격 통제는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지만, 지속하기 어렵다.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게 된다. 예컨대 석유 최고가격제는 당장 기름값을 누르니 인기 있는 정책인지 몰라도 임시방편이다. 차액을 재정으로 메워야 하는데, 시작부터 잘못된 정책이었다. 기름값을 싸게 묶어 놓은 채 아껴 쓰라고 차량 5부제를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한쪽에선 돈 풀면서 세금 동원해 집값 잡겠다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다. 정부가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유가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하고, 국민 스스로 위기감을 느껴 차를 덜 쓰도록 유도해야 한다. 2차 쇼크 때 썼던 방법이다.

정공법을 견뎌낼 수 없는 취약계층에 한해 정부가 도와야 한다. 재정은 이럴 때 요긴하게 쓰는 것이다. 정부는 26조원 전쟁 추경을 편성하면서 판을 벌였다. 취약계층뿐 아니라 전 국민의 70%에게 지원금을 지급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추경을) 현금 나눠주기라고 하는 건 과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무려 70%에게 돈을 쥐어주면 현금 나눠주기가 맞다. 뒷감당 생각 않고 인심 쓸 정도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 반도체 호황 덕분에 모처럼 더 걷힌 세금이 있다고 탈탈 털어 쓸 게 아니다. 취약계층을 위해 아껴두거나 빚부터 줄이는 게 순서다.

추경을 포함하면 올해 예산은 11.8%나 늘게 된다. 수퍼 확장 예산이다. 국제 유가가 오르고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렇게 돈을 풀면 물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을 것이다. 설령 지원금 덕분에 경기가 조금 나아져도 물가가 많이 오르면 다 잃는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꼴이다. 2차 때처럼 지금은 포퓰리즘을 멀리하고 긴축·안정 정책을 써야 할 시기다. 정부는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설득해야 한다. 성장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물가다.





고현곤([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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