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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의 문화노트] 결핍의 순간, 창조는 시작된다

중앙일보

2026.04.21 08:10 2026.04.2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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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궁궐에선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데, 그게 제겐 재미있는 도전입니다.”

24일 서울 경복궁에서 열리는 제12회 궁중문화축전 개막제를 맡은 양정웅 연출가의 소회다. 그는 고궁 행사 연출의 어려움을 말하다가 2018년 맡았던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떠올렸다. 부족한 예산, 지붕 없는 곳이라는 한계가 대관령 하늘에 드론 1218대로 오륜기 형상을 수놓는 역발상으로 이어졌단다. 이번 경복궁 무대가 그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이유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인텔 슈팅스타 드론 1218대로 선보인 오륜기. [사진 인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인텔 슈팅스타 드론 1218대로 선보인 오륜기. [사진 인텔]

결핍과 제약이 창조를 자극한다는 사실은 넷플릭스 요리예능 흑백요리사 시즌2를 보면서 실감했다. 무한한 재료가 주어진 ‘요리천국’보다, 당근 하나로 버텨야 하는 ‘요리지옥’에서 더 흥미로운 요리가 나왔다. 선택지가 줄어들수록 요리는 발명에 가까워졌고, 무엇을 더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지가 결과를 갈랐다.

올해 17회째를 맞은 ‘홍진기 창조인상’의 역대 수상자 명단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상은 중앙일보·JTBC와 중앙화동재단이 과학기술·사회·문화예술 세 분야에서 혁신적인 성취로 사회 발전에 기여했거나 창의성으로 주목을 받는 젊은 인재 또는 단체를 발굴해 수여하는 상이다. 지난 수상자들 면면을 훑다 보니 그들이 남다른 건 각자가 안고 있는 결핍과 고민을 성실하게 메꿔왔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2023년 류성희 미술감독은 “그릇의 본질은 찰흙이 아니라 그 안의 빈 공간”이라는 노자의 말을 인용하며 수상 소감을 전한 바 있다. 창작의 본질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비울지 결정하는 과정이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으면 과제도, 에세이도, 소설 한 편도 뚝딱 나오는 시대다. 생성형 AI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재료를 제공하는 ‘요리천국’과도 같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종종 놀랍기보다 적당한 수준에 그친다. 매끄러운 결과물에선 그 어떤 고통과 결핍도 느낄 수 없다.

최근 김애란 소설가는 한 TV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AI와 인간의 결정적 차이를 ‘망설임’이라고 꼽은 바 있다. 말해야 할 순간에 머뭇거리거나 삼키는 짧은 공백. 인간의 한계처럼 보이는 그것이 실은 가장 큰 미덕이자 개성이라고 하면서다.

어떤 창작이 우리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결과의 완성도뿐 아니라 그 안에 스며 있는 선택과 포기의 흔적, 그리고 망설임의 시간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 역시 무수하게 썼다 지운 흔적의 결과다.





강혜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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