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전모(31)씨는 요즘 쇼핑앱 대신 증권앱을 먼저 연다.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아 한 달에 30~40만원씩 옷을 사던 그였다. 전씨는 “예전엔 계절이 바뀌면 옷부터 샀는데, 지금은 ‘이 돈이면 주식 한 주라도 더 사자’는 생각이 먼저 든다”며 “주식 오르는 재미를 느끼고 나니 쇼핑은 돈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물건은 사는 순간 감가상각되지만, 주식은 오를 수도 있으니 더 값진 소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코스피가 역대급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세대 불문 투자 열풍이 불고 있다. 통상 경제학에서는 주가가 오르면 가계 자산이 늘고, 그에 따라 소비도 함께 늘어나는 ‘부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와 반대되는 ‘대체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주가가 워낙 빠르게 오르다보니 생활비까지 줄이면서 주식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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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장 놓칠라” 옷 대신 주식 산다
주식을 마치 하나의 소비재처럼 여기는 현상도 나타난다. 삼남매를 키우는 워킹맘 손모(37)씨는 매달 17일을 ‘주식 사는 날’로 정했다. 손씨는 “요즘엔 액세서리도, 신발도, 가방도 별로 사고 싶지 않은데 꼭 사고 싶은 게 바로 주식”이라며 “주식을 살 때는 쇼핑할 때처럼 도파민이 팡팡 터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은 끝날 것 같고 코스피는 앞으로 더 오를 것 같아 지수 추종 상장지수펀드(ETF)를 팔지 않고 꾸준히 사 모을 생각”이라고 했다.
차준홍 기자
한국은행도 이런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2월 경제전망보고서를 통해 최근 증시 활황이 소비보다 투자를 우선시하게 만들면서, 주가 상승의 소비 진작 효과가 단기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한은 추산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주식·채권·펀드 자산에 대한 한계소비성향, 즉 증가한 소득 중 소비에 투입된 비율은 1%에 그쳤다. 주식과 채권·펀드로 자산을 1000만원 더 불렸더라도 실제 소비 지출로 이어진 건 이중 10만원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가장 큰 배경으로는 ‘소비의 기회비용’이 꼽힌다. 보고서는 “최근의 가파른 자산가격 상승 기대는 가계로 하여금 소비보다는 투자를 우선시하게 만들어, 주가 상승에 따른 소비 진작 효과가 단기적으로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짚었다. 당장 지갑에 있는 돈을 써버리면 주식 투자 기회를 놓친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증시 변동성이 큰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식으로 돈을 벌더라도 이를 지속 가능한 소득으로 생각하지 않아 지갑을 쉽게 열지 못 한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최근 증시의 높은 변동성은 현재의 평가이익을 가처분소득의 영구적 증가로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어 소비 진작 효과를 제약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중동전쟁으로 증시 변동성이 심했던 3월 소비자심리지수는 107.0으로 전월보다 5.1포인트 하락했다. 비상계엄 사태 당시 2024년 12월(12.7포인트 하락) 이후 최대 낙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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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출 챌린지까지…전문가 “변동성 주의”
이 같은 현상은 젊은 층일수록 더 두드러졌다. 내년 결혼을 앞둔 이모(29)씨는 최근 ‘무지출 챌린지’를 시작했다. 외식 대신 도시락을 싸 다니고, 커피도 줄여 돈을 쓰지 않는 날을 늘리는 식이다. 그렇게 아낀 돈은 모두 ETF에 넣는다. 이씨는 “대출도 막혀있고 집을 사려면 투자밖에 답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준빈 한국은행 경기동향팀 과장은 “젊은 층처럼 보다 공격적인 포지션을 취해서 자산 이익을 거둬야 하는 계층일수록, 또 가계 여건이 어려울수록 소비의 대체 효과가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투자하느라 생활비가 부족해지는 ‘NISA 빈곤’, ‘NISA 거지’ 현상이 화두로 떠올랐다. NISA는 일본의 소액 투자 비과세 계좌로, 한국의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와 비슷하다. 일본은 2024년부터 이 계좌의 세제 혜택을 확대하며 증시 부양에 나섰는데, 투자 열풍의 정도가 과해지면서 생활비는 물론 연애·공부·취미에 쓰는 돈까지 아껴가며 투자하는 젊은 층이 늘어난 것이다.
코스피가 2% 넘게 상승해 사상 최고치에서 장을 마친 21일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가 표시되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장보다 169.38포인트(2.72%) 오른 6388.47에 거래를 마치며 지난 2월 26일 기록한 종가 기준 사상 최고점(6307.27)을 약 2개월 만에 경신했다. 연합뉴스
시장 전체로 넓혀 보면 주식 소득의 양극화 역시 부의 효과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주가 상승의 수혜가 고소득층에 집중되지만, 소비로 이어지지 않아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고소득층(소득 상위 20%) 주식 자산의 한계소비성향은 0.8%로 전체 평균인 1%를 밑돌았다. 주식으로 더 많은 돈을 번 사람일수록 저축이나 재투자에 나서면서 소비를 늘리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식으로 돈을 벌어도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 소비 자체를 낭비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소비 트렌드가 바뀐 것”이라며 “내수 진작을 위해서는 물가 안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의 소비를 줄이는 것은 미래 소비를 늘리기 위한 선택이지만, 증시의 높은 변동성은 감안해야 한다”며 “자산이 과도하게 주식에 집중되면 전체 자산 수익률이 낮아질 위험성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