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신복룡의 신 영웅전] 버나드 쇼의 인생론

중앙일보

2026.04.22 08:04 2026.04.22 13:41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국민은 살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실질 소득에도 문제가 있지만 대체로 체감(體感)의 문제이다. 그럴 때면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B. Shaw·1856~1950·사진)의 충고가 도움이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반병의 포도주가 있을 때 누구는 “왜 반병밖에 없을까?” 하고 아쉬워할 것이고, 누구는 “이 좋은 포도주가 반명이나마 남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흡족히 여길 것이다. 엄연한 현실은 포도주가 반병이라는 사실이지 반갑고 아쉬운 것은 각자의 몫이다.

버나드 쇼는 영국 더블린의 중산층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허영이 심하여 당대의 음악가 리(G. J. Lee)를 따라다니다가 남편과 자식을 두고 그와 함께 런던으로 갔다. 쇼는 자기가 리의 친생자라는 수군거림이 싫어 20대에 고향을 떠난 뒤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얼굴의 마마 자국을 숨기려고 수염을 길렀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는 수다스럽고 부산했다. 그는 페이비언 협회의 논객이었지만 스탈린과 무솔리니를 찬양함으로써 정치적 행보는 빛을 잃었다. 평생 채식주의자였다.

셰익스피어를 존경하고 그의 작품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풍자와 모사(模寫)가 많아 읽을 때는 상큼한 맛이 있지만, 독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지는 않는다. 60권의 작품을 남겼고, 그의 영화 작품에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데버러 커가 출연하여 그의 성가를 높였다.

그는 입이 재서 남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하여 인도인에게 아픔을 주었다. 그가 죽자 외교관 해럴드 니컬슨 경(H. Nicolson)은 그의 기념물 설치를 말리면서 “그의 작품은 50년 안에 잊힐 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1925)을 무색하게 했다. 문인에게는 판매 부수보다 덕망이 더 중요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