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프타(Naphtha). 지난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연합 공습으로 시작한 이란전쟁의 여파로 심각한 공급 부족을 겪고 있는 대표적 원료 중 하나다. 원유를 증류할 때 생기는 석유화학물질로, 플라스틱·비닐 등 웬만한 공산품의 원재료이기도 하다.
이처럼 나프타는 현대인의 필수 원재료이지만, 그래서 지금과 같은 전쟁상황이 되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과 같은 나라의 경제 목줄을 조이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론 그 특성상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환경오염 물질이기도 하다. 대안이 없을까.
버리는 왕겨·커피 찌꺼기 활용
강철처럼 강하면서 가벼운 소재
섬유질 특성상 100% 생분해돼
포스코 등 대기업 앞다퉈 투자
노상철 에이엔폴리 대표가 나노셀룰로스 소재가 들어간 2차전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포스텍]
나노셀룰로스(Nanocellulose). 식물의 주성분인 셀룰로스, 즉 섬유질을 나노(1㎚는 10억분의 1m) 단위까지 잘게 쪼개놓은 물질이다. 마이크로(1마이크로미터는 100만분의 1m) 단위인 섬유질이 나노 단위로 작아지면 강철보다 강하면서, 가벼워진다. 섬유질의 특성상 100% 생분해되는 건 물론이다. 이런 뛰어난 물성 때문에 나노셀룰로스는 석유화학 대체 물질로 떠오르고 있다.
경북 포항의 스타트업 ‘에이엔폴리’는 이 나노셀룰로스를 이용해 다양한 첨단 복합소재를 만들어낸다. 포스텍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노상철(53) 박사가 2017년 이 대학 황동수(49) 화학공학과 교수와 함께 창업했다. 황 교수는 나노셀룰로스와 홍합 접착 단백질 연구 분야의 석학이다. 노 박사가 대표 겸 최고경영자(CEO)를, 황 교수는 최고기술경영자(CTO)를 맡았다. 에이엔폴리는 이 같은 창업자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근까지 효성·롯데·포스코와 같은 대기업들의 전략적 투자를 끌어내는 등 총 19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지난 21일 포항 흥해읍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바이오특화단지에 자리한 에이엔폴리를 찾아 노 대표를 만났다. 회사 주변은 아직 산업단지용 토지와 도로만 조성된 단계지만, 에이엔폴리 사옥은 연면적 4429㎡(1340평) 규모의 3층 최신식 건물이었다. 수도권 스타트업에서 보기 힘든 넓고 아늑한 직원 휴게실을 마련해 두었다. 에이엔폴리는 본사와 공장을 겸한 이곳에 연간 1000t 규모의 나노셀룰로스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기술은 제품화됐을 때야 가치 있어”
Q : 연구 경력이 다채롭던데, 창업한 이유가 궁금하다.
A : “기초과학연구원(IBS)에 재직하던 시절, 단순한 팀 연구를 넘어 스스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했다. 마침 ‘기술이라는 게 제품화됐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황 교수의 조언에 창업을 결심하게 됐다.” (노 대표는 명지대에서 환경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포스텍에서 박사후연구원과 연구교수를 지낸 뒤 IBS를 거쳐 2016년 다시 포스텍 연구교수로 돌아왔다. 창업을 결심하고 나니 포스텍의 연구장비와 창업지원 시설, 제도가 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동창업자인 황 교수는 2023년 9월 또 다른 스타트업 블루카본을 창업하고 에이엔폴리를 떠났다.)
Q : 에이엔폴리의 비즈니스 모델은.
A : “왕겨나 커피 찌꺼기와 같이 버려지는 자원을 나노 크기의 물질, 즉 나노셀룰로스로 가공하는 거다. 이 소재는 기존 플라스틱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도는 높고, 산소 차단성이 뛰어나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포장재 소재(EVOH)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단순히 원료를 만드는 단계를 넘어, 리튬을 붙여 배터리 성능을 높이거나 단백질을 결합해 3차원 세포 배양 지지체로 활용하는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 맞춤형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자연에 배출되면 수천 년 동안 분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리는 과불화화합물(PFAS)을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소재이기도 하다.”
Q : 국내외 경쟁기업이 적지 않을 텐데.
A : “나노셀룰로스 시장은 일본과 캐나다가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솔제지 같은 대기업은 물론 여러 스타트업이 뛰어든 상태다. 하지만 에이엔폴리는 범용 패키징이나 화장품 원료에 집중하는 경쟁사들과 달리 ‘고부가 기능성’ 시장을 공략해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2차전지, 3차원 세포배양 지지체
Q : 에이엔폴리만의 기술력이라면.
A : “나노셀룰로스를 단순히 원료 상태로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사가 원하는 특성에 맞춰 재가공하는 기술이다. 범용제품보다 순도가 높고 품질이 균일해 재현성이 뛰어나다. 2차전지 배터리 성능을 높이거나 3차원 세포 배양 지지체로도 활용할 수 있다. 나노셀룰로스를 30% 이상 혼합하면서도 플라스틱의 강도를 오히려 높이는 복합소재 기술은 에이엔폴리만이 가진 탁월한 강점이다. 효성 등 대기업들이 전략적 투자를 한 것도 이런 차별적 기술 덕분이다.”
Q : 전략적 투자를 한 대기업들이 원하는 게 뭘까.
A : “포스코는 친환경 첨단소재 확보 차원에서 가장 큰 규모인 70억원을 투자했다. 철강을 대체할 수 있는 가볍고 강한 차세대 경량화 소재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효성은 식품 유통기한을 늘리는 데 필수적인 고기능성 산소 차단 포장재 기술의 국산화를 위해 30억원을 투자했다. 이를 위해 6개월간의 정밀 검증을 거치기도 했다. 롯데케미칼은 기존 석유화학 기반 플라스틱을 대체할 친환경 소재 발굴은 물론, 배터리 바인더 등 2차전지 소재로의 영역 확장에 기대를 걸고 있다.”
김경진 기자
에이엔폴리는 현재 본격적 성장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다. 그간 진행해온 여러 기술검증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올해 5억원, 내년 20억~30억원가량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양산 체계가 안정화되는 2028~2029년경에는 매출 200억원을 예상한다.
나프타 사용량 줄이고 성능은 높여
Q : 이란전쟁으로 나프타 등 석유화학물질 수급에 큰 어려움이 있다. 대안이 될 수 있나.
A : “석유화학 기반의 원료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나프타를 100% 완벽히 대체하기는 어렵지만, 에이엔폴리의 기술은 석유화학 유래 제품의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기존 플라스틱에 나노셀룰로스를 30~50% 혼합해 석유 유래 원료 사용량을 절반 가까이 낮추면서도 강도는 오히려 높이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2차전지 소재나 의료용 창상 피복제 분야에서는 기존 우레탄 등 석유계 물질을 전면 대체하려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나노셀룰로스가 석유시대 이후를 대비할 탄소 중립형 소재로서 나프타 공급 위기를 해결할 핵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Q : 지방 스타트업으로서 투자나 인재채용에 어려움이 없나.
A : “포항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에 수도권에 비해 투자사를 접할 기회가 적고 인재 채용에도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도권은 IR(기업설명회) 기회가 많고 투자사가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등 접근성이 좋지만, 지방은 효율성을 이유로 투자자들이 자주 내려오지 않는다. 인재 채용 역시 수도권에 비해 지원자군이 훨씬 작아 우수인력을 선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에이엔폴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텍 기술투자의 지원을 받아 서울에서 대규모 IR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또 전문연구 요원 제도 활용과 주거비 지원 등 파격적인 복지를 제공하면서 인재 확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김성근 포스텍 총장
“에이엔폴리는 포스텍 연구실에서 출발해 포항에 뿌리내린 기술 기반 창업기업이다. 노상철 대표가 우리 대학의 기초과학 연구 성과와 기술 이전, 창업 인프라 지원을 바탕으로 친환경 나노셀룰로스 소재를 개발하며 성장해 왔다. 포스텍은 앞으로도 에이엔폴리가 지역과 함께 글로벌 강자로 도약할 수 있도록 기술 협력과 지원을 지속하겠다.”
배재한 롯데벤처스 수석심사역
“에이엔폴리는 고순도 나노셀룰로스 기반의 친환경 첨단소재 기술력과 상용화 실행력을 겸비한 기업이다. 롯데케미칼·롯데정밀화학과의 전략적 시너지 가능성은 물론, 지속가능 소재 시장에서 성장성과 미래산업으로의 확장성을 높게 평가해 투자를 결정했다. 그룹의 신소재 포트폴리오 강화와 친환경 전환 전략에 부합한다는 점도 중요한 판단 근거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서울대·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