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수퍼사이클’이 한국 경제에 거대한 세수 호재를 안겨주고 있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촉발된 메모리 반도체 호황 속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을 예고하고 있다. 두 기업이 올해 납부할 법인세 규모만 최대 124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단 두 기업이 내는 세금만으로 지난해 전체 법인세 세수 84조6000억원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이번 반도체 호황은 세수 부족과 저성장에 시달려온 한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천재일우의 기회다. 다만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의 파업이 현실화하면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파업 시도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문제는 정부의 재정 운용 기조다. 정부는 ‘2027년 예산안 편성지침’에서 적극재정 기조를 이어가기로 했다. 올해 본예산에 추가경정예산까지 더하면 총지출은 754조원에 이른다. 여기에 ‘전년 대비 5% 증액’ 기조까지 유지되면 내년 예산은 사실상 800조원에 육박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경기 둔화 국면에서 재정의 적극적 역할은 필요하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에 따른 일시적 세수 증가를 구조적 재정 여력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경기 순환 산업이다. 호황기엔 막대한 세수를 안겨주지만 사이클이 꺾이면 세수도 급격히 줄어든다. 구글은 물론 엔비디아조차 메모리 사용을 줄이면서 AI 성능을 높이는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금의 반도체 호황이 영원할 수 없다는 의미다.
더구나 한번 늘어난 재정 지출은 쉽게 줄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한국의 국가부채(D2) 비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54.4% 수준으로 주요 선진국보다 낮다는 점만 내세우며 재정 확대에 나설 일은 아니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라는 결정적 차이를 직시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은 달러와 엔화를 발행하지만 한국 통화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통용력이 제한적이고 위기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국제 금융시장은 비기축통화국의 재정 건전성을 훨씬 엄격하게 평가한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경제를 지탱한 최후의 방파제 역시 건전했던 재정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대변인의 “한국의 부채는 지속 가능한 수준이며 부채 위기 가능성도 낮다”는 발언을 소개하며 확장 재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IMF 역시 공식 보고서에선 재정 건전성과 성장잠재력 확충의 병행을 주문해왔다. 불황기 재정 확대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과도한 재정 지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부채 증가를 우려하는 재정건전성 주장을 ‘포퓰리즘적 긴축론’으로 몰아붙인 이 대통령의 인식이나 초과이윤 또는 초과세수를 국민배당금으로 쓰자는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구상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넘치는 세수를 ‘국민배당’과 같은 발상의 나눠주기 식으로 돌릴 일이 아니라 성장 기반 확충 등 미래를 위한 투자가 엄격한 재정 규율 아래 이뤄져야 한다. 행여 세수 걱정이 사라졌으니 돈 풀기에도 브레이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국가재정법 제90조는 초과세수로 발생한 세계잉여금의 30% 이상을 국가채무 상환에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미래 위기에 대비한 ‘재정 방파제’로 축적하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지금의 호황이 영원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반도체 세수 대박을 일회성 인기 정책이나 현금성 지출 확대의 재원으로 삼아선 안 된다. 미래 성장동력 확충에 전략적으로 투자하되 동시에 국가부채를 줄여 재정 신뢰를 높이는 데 우선 활용해야 한다. 반도체 세수 대박을 미래 성장동력 확충과 재정 방파제 보강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