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간) 페루 리마에서 열린 어머니날 기념 행사에서 게이코 후지모리 민중의힘 대선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페루의 우파 정치인이자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인 게이코 후지모리(50)가 네 번째 대통령 선거 도전에 나선다.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뿌리 깊은 ‘반(反)후지모리’ 정서와 본인의 부패 논란을 딛고 중남미를 휩쓸고 있는 블루타이드(Blue Tide·우파의 물결) 흐름에 탑승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1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은 페루 선거관리당국을 인용해 “오는 6월 7일 대선 결선 투표에서 우파 인사인 후지모리 ‘민중의 힘’ 후보와 좌파 인사인 로베르토 산체스 ‘함께하는 페루’ 후보가 맞붙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달 12일 치러진 1차 대선 투표의 개표 결과가 한 달 여 만에 발표된 가운데,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선거법에 따라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된 것이다.
앞서 1차 투표에서는 후지모리가 17.8%를 득표해 12.03%를 득표한 산체스를 약 5%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다만 실제 결선 투표에선 박빙이 예상된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 페루가 대선 1차 투표 이후 실시한 첫 여론조사 결과 후지모리와 산체스는 각각 38%를 얻어 동률을 기록했다. 산체스는 페드로 카스티요 현 페루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로베르토 산체스 '함께하는 페루' 대선후보. 로이터=연합뉴스
후지모리는 무려 대선 4수생이다. 이혼한 어머니를 대신해 19세 때부터 아버지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것을 계기로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지만, 앞선 세 차례의 대선 도전 모두 고배를 마시고 물러났다.
후지모리는 매번 결선 투표까지는 무리 없이 진출했다. ‘후지모리즘’으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과 반좌파 정서 덕분에 고정 지지층이 탄탄해서다. 후지모리즘은 우파 포퓰리즘과 보수주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정치 이념으로 후지모리 후보의 아버지인 후지모리 전 대통령(1990~2000년 집권, 2024년 사망)이 남긴 정치적 유산이다.
하지만 결선 투표에 올라간 뒤엔 ‘반후지모리’ 유권자들의 결집으로 번번이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했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경제 안정과 반테러라는 성과도 있지만, 권위주의 정치와 인권침해, 부패 문제로 비판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후지모리에게는 ‘독재자의 딸’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다”고 했고, 로이터는 “후지모리가 4번째 대권 도전인데도 높은 비호감도 때문에 (좌파 후보와) 초박빙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고 관측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후지모리의 네 번째 패배를 예상하기도 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2018년 3월 15일 페루 카야오 해군기지에서 열린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본인의 부패 논란도 걸림돌이다. 후지모리는 2018년 불법 대선자금 수수 의혹에 휘말리며 1년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석방 두 달 만에 다시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갔다가 3개월 만에 석방됐다. 아버지 후지모리 전 대통령도 2000년 부패 스캔들이 터지자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2009년 국가 비밀 암살 조직 배후 혐의 등 인권 침해 문제로 25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지난달 실시된 대선 1차 투표 관련 부정선거 논란도 있다. 선거 당일 페루 수도 리마에서는 물류 문제로 수만 명의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개표가 지연되는 과정에서 리마의 한 쓰레기통에서 투표용지함이 발견되는 등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재투표 요구가 나왔지만 선관위가 수용하지 않았고, 논란 속에 결선 투표 진출자가 최근 결정됐다.
이러한 난관들을 뚫고 후지모리가 당선된다면, 중남미를 물들이고 있는 블루타이드가 한층 영향력을 확장하게 될 전망이다. 최근 중남미에서는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2023년 취임),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2023년 취임), 나스리 아스푸라 온두라스 대통령(2026년 1월 취임) 등 보수 성향 지도자들이 대거 집권하며 이른바 ‘우클릭’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지난 수 십 년 간 중남미를 휩쓸어온 핑크 타이드(Pink tide·좌파의 물결)의 종식이 임박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이번 대선에서 선출된 차기 페루 대통령은 7월 28일 공식 취임한다. 임기는 2031년까지 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