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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타임머신] 5·18 광주민주화운동

중앙일보

2026.05.17 08:06 2026.05.1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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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학생들의 결의는 분명했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인 학생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저지당하자 광주역에 재집결했다. 시위대열이 점점 불어나면서 공수부대가 무력 진압에 나섰다. 오후 들어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시위가 해산됐다.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9일에는 학생뿐 아니라 분노한 시민들까지 합세했다. 20일은 도시 빈민과 노동자 등이 적극 참여하며 선두에 섰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시위대는 탈취한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항쟁을 시작했다. 항쟁 지도부는 총공세를 펼쳐 22일 도청과 도경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 시내를 장악했지만, 27일 새벽 0시를 기해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5000여 명의 계엄군에 의해 제압당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193명이 사망하고 수천여 명이 부상을 당한,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비극의 시작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란 혁명이 발생하면서 유가가 폭등하고 2차 오일쇼크가 벌어져, 수출 주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던 한국 경제가 치명타를 입었다. 흉흉한 민심 속에 1979년 부마항쟁이 벌어졌고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고자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민의 반발을 총칼로 제압했다. 광주는 굽히지 않았고 자유의 나무는 피를 요구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를 회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민군은 태극기를 몸에 감고 애국가를 부르며 싸웠다. 전남도청에 설치된 본부에 간첩 여부를 조사하는 조사과가 있었을 정도로 시민군의 애국심은 분명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기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헌법적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 도시와 지역에 국한된 비극에 머물 수 없다. 일부 정당과 세력의 정치적 전유물처럼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 그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일 것이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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