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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보다 열악, 숨도 못 쉬고 발작”…호르무즈 갇힌 2만명 절규 [단독 인터뷰]

중앙일보

2026.05.18 22:58 2026.05.1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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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중순 이라크 해안에서 폭격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인 한 선박. 불길이 치솟고 있다. 사진 국제운수노조연맹(ITF)

지난 3월 중순 이라크 해안에서 폭격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인 한 선박. 불길이 치솟고 있다. 사진 국제운수노조연맹(ITF)

" 불이야, 불! "
적막한 어둠을 뚫고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1000m도 떨어지지 않은 바로 옆 유조선 한 척이 이미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검붉은 불길이 밤바다를 집어삼켰고, 누군가는 “드론이다”라고 외쳤다. 안도감도 잠시, 곧 “다음은 우리 차례일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언제 이곳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13일 스티븐 코튼(57) 국제운수노조연맹(ITF) 사무총장이 중앙일보와의 화상인터뷰로 전한 호르무즈해협에 갇힌 선원들의 현실이다. ITF는 현재 해협 인근에 발이 묶인 선원들의 구조와 송환 지원에 관여하고 있다. ITF에 따르면 전쟁 이후 접수된 선원 지원 요청은 2200건이 넘는다. 송환 요청, 식량·연료 부족 문제가 대부분이다.

코튼 총장은 현재 걸프 지역에 약 2000척의 선박과 2만 명의 선원이 머물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조선뿐 아니라 벌크선, 컨테이너선, 크루즈선까지 발이 묶여 있다. 그는 “선원들은 군인이 아니라 바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인데, 무장 병력이 민간 선박에 승선하는 상황 자체가 충격적”이라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공황 발작을 겪은 선원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스티븐 코튼 ITF 사무총장이 중앙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사진 줌 캡처

지난 13일 스티븐 코튼 ITF 사무총장이 중앙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사진 줌 캡처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은 휴전 중이지만, 해협에서는 여전히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목격하고 있다고 한다. 코튼 총장은 “선원들은 걸프 국가들의 방공망 아래 정박한 채 바다 한가운데서 날아가는 미사일과 드론 폭발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며 “드론이 선박 가까이 날아와 폭발하거나, 요격된 미사일 잔해가 배 위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또 “미국 국적 유조선 한 척은 약 1000m 거리에서 드론 폭발을 목격했다”는 선원의 이야기도 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에 의해 나포된 에파미논다스호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에 의해 나포된 에파미논다스호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해군 병력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려던 선박에 승선하는 모습이라고 이란 측이 주장한 장면. AFP=연합뉴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해군 병력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려던 선박에 승선하는 모습이라고 이란 측이 주장한 장면. AFP=연합뉴스


장기 정박에 따른 정신적 고립감도 심각하다. 그는 “두 달 가까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과 교대근무만 반복하는 삶은 사실상 감옥에 갇힌 상태”라며 “육지로 나갈 수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다. 한마디로 죄수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형 선사는 평판을 의식해 선원 처우에 신경 쓰지만, 일부 저가 선사들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ITF는 현재 필리핀·인도 정부와 함께 선원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지원 문제도 논의 중이다.

통상 국제 해운업계는 수개월 단위로 선원을 교대한다. 하지만 현재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는 대체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계약 기간이 끝난 선원들도 배에서 내리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코튼 총장은 “배를 유지하려면 최소 승무원 수를 채워야 하는데, 새로운 선원이 자발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와야 한다”며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오만의 북부 무산담 반도에 위치한 항구 도시 카사브 앞 호르무즈해협에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 17일(현지시간) 오만의 북부 무산담 반도에 위치한 항구 도시 카사브 앞 호르무즈해협에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다행히 최근 인터넷 환경이 개선돼 가족과 영상통화는 가능해졌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고 한다. 코튼 총장은 “가족들이 미국과 이란 관련 뉴스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선원들뿐 아니라 그 가족의 공포와 불안도 함께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역시 이번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코튼 총장은 “한국은 에너지 수입 상당 부분을 이 항로에 의존하는 국가”라며 최근 폭발 사고가 발생한 한국 관련 선박 나무호를 언급했다. 그는 “무엇보다 선원들이 다치지 않은 점에 감사한다”면서도 “정확한 폭발 원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고 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지난 16일 기준 해협 내 한국 선박 승선 선원은 125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HMM 나무호 선체 파공. 연합뉴스

HMM 나무호 선체 파공. 연합뉴스

프랑스 브레스트의 해양정보협력감시센터(MICA)에서 지난달 27일(현지시간) 토마 스칼라브르 사령관이 호르무즈해협 일대 선박 위치가 표시된 화면을 가리키고 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브레스트의 해양정보협력감시센터(MICA)에서 지난달 27일(현지시간) 토마 스칼라브르 사령관이 호르무즈해협 일대 선박 위치가 표시된 화면을 가리키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번 위기로 국제 해운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코튼 총장은 일부 선박들이 해협 통과 과정에서 국적을 바꾸는 사례를 언급하며 “선주들이 세금과 규제를 피하기 위해 국적을 바꾸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현재 해운 시스템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국제 제재를 피해 원유 등을 운송하는 이른바 ‘그림자 선단(shadow fleet)’ 문제 역시 이와 연결된다는 설명이다.

코튼 총장은 인터뷰 말미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의 80~90%는 바다를 통해 운반된다”며 “선원들은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이어 “선원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갈등 한가운데 놓여 있다”며 조속한 종전을 촉구했다.





한지혜([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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