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김도연의 마음 읽기] 오월의 어느 하루

중앙일보

2026.05.19 08:08 2026.05.19 13:2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강원도 대관령의 봄은 오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대관령에서 살던 시절 나는 앞대에서 꽃소식이 갓 깨어난 병아리 울음처럼 피어나면 늘 기가 죽곤 했다. 내가 사는 마을엔 아직 메마른 가지 사이로 가끔 눈보라가 날렸기 때문이었다.

배낭을 꾸려 등에 지고 산수유·매화·벚꽃이 한창이라는 아랫녘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는데 자잘한 일상사에 묶여 있다 보니 그마저 쉽지 않았다. 겨울도 봄도 아닌 황량한 사월의 풍경 속을 묵묵히 오가며 목련 가지를 올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럴 때면 늘 등이 가려웠다.

대파 심고 두릅 따고 났더니
고추 심으러 오라는 대관령 전갈
나의 오월, 너무 평온한 것 아닐까

대관령을 떠나 살면서부터 나도 마침내 사월의 봄을, 봄꽃을 일찍 접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자태가 아름다운 꽃나무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그럴듯한 글과 함께 서둘러 SNS에 올리거나 지인들에게 전송하느라 바빴다. 꽃이 피지 않은 대관령은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가던 중 사월의 끝자락에 대관령에서 연락이 왔다. 대파를 심으러 오라는. 아니 무슨 사월에 대파를 심으려는 거냐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날이 따뜻해져서란다. 집 뒤편의 돌배나무는 꽃을 피웠느냐고 물으니 아직이란다. 주말에 형제들이 모두 모여 심을 것이니 일찍 와야 한다는 당부까지 이어졌다. 나의 팔자 좋은 봄꽃 놀이를 끝마쳐야 한다는 전갈이었다.

대파는 밭고랑에 쪼그려 앉아 심어야 했다. 이랑이 아니라 고랑에 모종을 심었다. 이랑에 올려놓은 모판에서 모종을 하나씩 뽑아 반 뼘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채 흙에 묻는데 모판 하나를 비우기도 전에 허리와 무릎이 아프고 입에선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늘이 없기에 챙이 넓은 모자를 써도 얼굴은 술에 취한 듯 화끈거리고 등때기와 겨드랑이로 땀이 줄줄 흘렀다.

한 고랑씩 맡아서 심는데 출발은 똑같이 해도 도착하는 시간은 제각각이었다. 추월을 당하면 은근히 기분이 나쁘지만 그렇다고 쫓아갈 힘도 없었다. 쫓아가려고 애쓰다간 골병만 든다. 그냥 밭 옆 나무 그늘로 가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힘을 얻어오는 게 나았다. 끙끙거리지 않는 사람은 가장 나이가 많은 엄마밖에 없었다. 엄마는 반도 심지 못한 내 고랑을 대파로 채워주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의 대파 심기가 끝났고 돌아와 며칠을 파스 냄새에 묻혀 지냈다.

오월이 돌아왔다. 대관령의 봄꽃과 산나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달이었다.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두릅을 따러 가야 했다. 사실 내가 산에서 따거나 뜯을 수 있는 나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 그게 그거 같아서 헛갈렸다.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배낭에 막걸리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넣어 어깨에 메고 키가 큰 두릅나무를 걸어서 당길 수 있는 갈고리처럼 생긴 나무 지팡이를 들고 산으로 향했다. 요즘 산은 예전처럼 길이 거의 없었다. 가시덤불을 만나면 네발 달린 짐승처럼 빠져나가야 했다. 두서너 개의 산을 넘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두릅나무 우듬지에서 연둣빛 잎을 펼치고 있는 두릅을 만나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둣빛은 갓 피어난 두릅이라고 나는 고집한다. 땀 냄새를 맡은 자그마한 파리가 수시로 달려들어 개울로 내려가 얼굴을 씻고 막걸리를 마셨다. 오월의 어느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아, 언젠가는 어두워질 때까지 두릅을 따다 멧돼지 울음을 듣고 우사인 볼트처럼 뒷산에서 집까지 뜀박질한 적도 있었다.

다시 대관령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고추를 심어야 한다는 전갈이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허리와 무릎에 있지도 않은 통증이 밀려오는 듯했다. 고추도 대파처럼 밭고랑에 쪼그려 앉아 심어야 하는 일이다. 날도 하필 석탄일 연휴다. 눈매가 형형한 스님을 만나러 절에 갈 계획을 세웠는데.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고추도 심고 더불어 절에도 가는 방법은 없을까. 전쟁 소식을 전하는 텔레비전을 보며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 고민에 빠져도 되나. 어떤 이들은 오월을 건너가기 위해 숨죽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의 오월은 너무 가벼운 게 아닐까.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작 대파와 고추를 심고 두릅을 따는 게 전부일까.

김도연 소설가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