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바둑은 닮았다. 바둑은 ‘집’이 많아야 이기고 선거는 ‘표’가 많아야 이긴다. 바둑은 판세가 엷어지는 건 금물이다. 실리를 지나치게 추구하면 판이 엷어지는데 엷어지면 실밥 터지듯 여기저기서 사고가 난다. 두터움은 좋은 것이다. 당장 집을 안겨주지는 않지만 반드시 보상한다. 바둑의 대고수 AI는 특히 두터움을 좋아한다. 선거도 비슷하다. 두터움이란 신뢰·평판·이미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단 두터움이 형성되면 대세를 지배하게 되고 실수에도 끄떡없이 버텨주는 힘이 된다.
바둑과 선거의 필승 전략, 닮은꼴
무리한 공격은 종종 내 발등 찍어
어깨짚기 같은 너그러운 행마를
이번 6·3 선거는 승부의 관점에서 보면 별 재미가 없었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절윤’을 놓고 분열하며 지리멸렬의 양상을 보이는 바람에 승부가 일찌감치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기와 주가상승의 분위기를 등에 업은 민주당은 ‘부자 몸조심’이 유일한 전략이라 할 정도였다. 하나 선거판에 조작기소특검법이란 괴이한 수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왔다.
갈팡질팡 행마 끝에 축에 몰리고 말았던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괴물총통국가, 공산주의 등을 외치며 반격의 웅변을 쏟아냈다. 야권은 계파와 상관없이 모두가 공격에 가세했다. “공격은 최상의 수비”란 말은 이 상황에 적합했다. 큰 공격이 작은 약점들을 덮어줬다. 터져 나오던 분열의 목소리들은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보수·중도·진보. 이 셋 중 수가 많은 중도는 중도보수와 중도진보로 나뉜다. 그러나 투표장에서 중도보수는 그냥 보수가 되고 중도진보는 그냥 진보가 된다. 승부는 49대 51로 나타난다. 이번에는 다를 것 같았다. 법정에서 수시로 들려오는 내란이라는 단어가 중도보수의 발목을 잡았다. 내란은 물론이고 윤어게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양당의 지지율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조작기소특검법 이후 상당수의 중도보수가 생각을 바꿀 명분을 얻었다. 그게 어디까지냐가 이번 선거의 핵심이 됐다.
조작기소특검법은 강수라기보다는 무리수에 가깝다. 야권은 이 무리수 덕분에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이 회생의 분위기에서 장동혁대표가 또다시 계엄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윤어게인 쪽에도 상당한 표가 있다고 믿는 듯하다.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고 내가 가는 이 길에는 분명 표가 있다는 장동혁의 믿음과 계산이 느껴진다.
계산은 곧 형세판단이다. 모든 전략은 계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야권은 여기저기 다른 계산을 한다. 계산이 다르니 전략도 다르다.
사방에서 공격의 칼날이 난무하는 가운데 선거가 2주 앞으로 다가왔다. 험한 말과 가차 없는 공격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공격은 바둑에서 가장 어려운 종목이다. 공격은 종종 내 발등을 찍는다. 공격에는 반드시 완급이 필요하다.
바둑 격언에 “궁할 때는 상대에게 기대라”는 말이 있다. 상대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이듯 그렇게 기댄다. 살기 없는 행마고 오히려 정감이 느껴지는 행마다. 신기하게 거기서 내 돌의 탄력이 생겨난다.
기대기 행마 중의 대표가 ‘어깨짚기’다. 알파고는 이세돌과 대결할 때 5선에서 어깨를 짚어 바둑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어깨짚기는 상대진영을 파괴하는 대신 상대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의 집을 내주겠다는 행마다. 근데 5선이라니! 5선에서 어깨를 짚으면 상대의 집이 4선에서 만들어진다. 3선은 실리선이고 4선은 세력선이다. 4선의 집은 크다. 가장 놀란 사람은 이세돌 자신이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이세돌은 이 너그러운 행마에서 오히려 알파고의 벽을 느끼며 절망했던 것이다.
AI 이후 어깨짚기는 기대기의 대표적인 행마가 됐다. AI는 고단할 때만 기대는 게 아니라 초반 10수 이전에도 기대곤 한다. 상대를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AI는 충고한다. 언뜻 세상 사는 이치가 느껴진다.
고소·맞고소·폭로의 진흙탕 싸움으로 흐르는 선거전을 본다. 상대를 싹 지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피를 튀긴다. 출전 선수들은 이것이 하수의 선거전인 줄 알면서도 헤어나지 못한다. 이 판국에 상대에게 기대는 모습, 상대의 어깨를 짚는 평화로운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