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헌법재판소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다. 헌재는 법조를 이루는 기관 중 유일하게 내란의 유탄을 피했다. 더불어민주당이 “검찰 공화국 다음엔 법관 공화국이 올 수 있다”(중진 의원)는 믿음 아래 대법원장과 법원의 권한을 쪼개는 데 열중한 덕에 헌재는 천재일우(千載一遇)를 맞았다. 지난 2월 27일 민주당은 4심제 논란을 딛고 재판소원법(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단독처리했다. 1988년 탄생 당시 법원의 반대로 못다 이룬 헌재의 염원, 대법원의 재판을 깨는 최고법원의 위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 것이다.
재판소원 1호로 기업 사건 골라
대법원장에 ‘답변서’ 이례적 요구
“법원보다 위” 정치적 욕망 앞서나
헌재가 지난달 정원을 73명에서 93명으로 늘린 헌법연구관 자리를 채우는 공개 채용에는 역대 가장 많은 257명이 지원했다. 민주당이 지난해 말 이 자리의 정년을 65세로 늘려놓은 게 한몫했다. 대형 로펌들이 앞다퉈 헌법소송팀 강화에 나서면서 전·현직 헌법재판관과 헌법연구관들의 몸값도 상승세다. 헌재 앞에 물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둑이 터진 마당에 흐르는 물을 주워 담자는 건 아니다. 문제는 헌재가 노를 젓는 방식이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헌재는 지난달 28일 ‘녹십자 소송’을 재판소원 1호 사건으로 정하고 ‘피청구인 대법원장’에게 “답변할 사항이 있으면 답변서와 이에 관한 증거자료 또는 참고자료를 제출하기 바란다”는 헌법소원심판회부통지를 보내면서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전엔 헌재가 누구에게 어떤 서면을 요구했다는 것을 공개하는 ‘친절’을 베푸는 걸 본 적이 없다. 이 친절로 헌재는 ‘대법원장도 일개 사건 당사자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공개 발신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었다.
만약 헌재의 요청대로 대법원장이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대법원의 판단을 구구절절 ‘변호’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답하든 판결문에 담긴 것이 전부도 최선도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결국 사법부를 지탱하는 국민 신뢰의 한 토막이 또 떨어져 나갈 것이다. 판결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재판 독립의 원칙을 침해한다는 논란도 있다. 나치 사법부에 대한 반성과 극복을 위해 재판소원을 도입한 독일에서 대법원장 등을 ‘피청구인’으로 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례적 친절보다 더 정치적인 건, 헌재가 시민의 기본권이 아닌 대형 로펌이 대리하는 대형 제약사의 이득이 걸린 문제를 1호 사건으로 택한 이유다. ‘녹십자 소송’은 녹십자가 HPV 4가 백신 입찰 담합을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린 과징금 부과 처분 등을 취소해달라고 제기했다가 서울고법에서 패소한 뒤 상고했지만 지난해 심리불속행 기각(이하 심불기각)으로 끝난 사건이다. 심불기각은 민사·행정·가사 소송에서 대법원이 2심까지의 기록을 검토한 뒤 법 해석 등에 특별한 쟁점이 없으면 별다른 이유 설명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대법원은 매년 상고사건의 70% 이상을 심불기각해 “재판받을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법원도 그 아우성을 잘 알지만, 해법으로 내놨던 상고법원을 국회가 걷어찬 뒤론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심불기각 비율을 낮추면 ‘재판받을 권리’의 한 축인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적 상황이다. 심불기각 판결에 대해 수차례 합헌 결정을 내렸던 헌재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헌재도 밀려드는 재판소원 중 본안 심사에 올릴 사안을 신속하게 거르기 위해 ‘사전심사’라는 불투명한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
1호 사건 선정에는 사법부의 ‘약한 고리’를 쳐서 “대법원이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선언하고 싶다는 헌재의 정치적 욕망이 깔린 게 아닐까. 뼈대가 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형사 사건과 행정 사건에서 위법성 판단이 엇갈렸던 ‘녹십자 소송’은 그 욕망의 먹잇감으론 제격이다. 이 판결을 취소하면서 대법원의 상고제도 운영에 일침을 가하는 모습은 헌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고 여권에도 카타르시스를 줄 일이다.
헌재가 누비게 된 정치적 공간은 여당이 날치기에 급급한 나머지 마땅히 법에 채워야 할 것을 비워둬 생긴 제도적 공백이다. 재판 취소 이후엔 어떤 절차가 이어져야 하는지, 재판소원의 대상은 어디까지인지, 대법원장을 ‘피청구인’으로 다루는 게 맞는지 등등. 법원에 쌓인 사건 기록을 얼마나 어떻게 넘겨받을지 등 실무적 준비에도 구멍이 크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길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이기에 헌재의 신중함이 절실하다. 제도 형성을 위한 법원과의 협의가 제도 안착의 관건이다. 급류에선 노의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배가 뒤집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