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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황제 노조’와 장관의 ‘노조 본색’

중앙일보

2026.05.2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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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제 입장에서 긴급조정권을 쓴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성전자 노사의 임금협상 잠정 합의안 도출 직후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소회다. 파국을 막기 위해 대화 중재자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취지일 것이다. 노고는 인정하지만 뭔가 석연찮다. 당시 상황은 국무총리와 산업통상부 장관이 긴급조정권 필요성을 시사하고, 대통령까지 공공복리를 위한 기본권 제한 가능성을 거론할 정도로 긴박했다. 파업 손실이 100조원에 달하고, 반도체 공급망 한국의 신뢰가 무너질 것이란 우려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정작 주무 부처 장관은 강력한 법적 제어 장치의 검토를 원천 배제했다고 고백했다.

이기적 요구에 대통령까지 비판
그런데도 장관은 긴급조정 배제
그게 노동가치 존중받는 길인가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김 장관 개인 신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식과 정도가 있다. 긴급조정권 발동이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삼성전자 파업만큼은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압도적 여론이었다. ‘미디어토마토’가 실시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74.2%가 파업 시 긴급조정권 발동에 찬성했다. 보수, 진보, 중도 가릴 것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긴급조정권 카드는 애초에 쓸 생각이 없었다니, 장관의 ‘노조 본색’ 아니면 설명이 힘들다.

김 장관은 특정 이익단체 대변자가 아니라 국정을 책임지는 국무위원이다. 만일 끝내 파업이 강행됐다면 어떻게 했을 건가. 긴급조정권 발동 대신 사표라도 낼 작정이었나. 그 경우 혼란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었나. 개인의 신념이 국정 방향과 타협할 수 없다면 차라리 미리 거취를 밝히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최악의 파국을 면한 것은 다행이나, 무용담처럼 과시할 일은 아닌 듯하다.

반도체 성과급 여파로 한국 노동시장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른 단층선이 생겼다. 그동안 대기업 노조의 귀족화 비판은 있었지만, 이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연대’와 ‘가치’를 표명했다. 이번 성과급 요구는 이런 최소한의 포장마저 걷어내버렸다.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이 하청업체와의 성과 공유 여부를 묻는 말에 “정규직은 공부도 많이 한 분들이고, 채용 조건이 달랐는데 일률적으로 같은 선에서 볼 수 없다”고 답했다.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다.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돌아누울 판이다.

사업부에 따라 최대 100대1에 달한 성과급 격차를 놓고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고, 주주·협력업체·지역사회도 파열음을 내고 있다. 시가총액 기준 대한민국 ‘투톱’ 기업이 전례 없는 ‘영업이익 연동형 성과급’을 공식화하자 타 업계 노조들도 비슷한 요구를 하며 투쟁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성과급은 언감생심,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의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 깊은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노동계의 태도는 어정쩡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양대 단체는 과도한 성과급 요구에는 침묵하다가 정부가 긴급조정권을 검토하자 반발하고 나섰다. 노동기본권 수호라는 명분으로 ‘황제 노조’를 감싼 꼴이 됐다. 노동단체 출신의 주무 부처 장관마저 노조의 극단적 이기주의를 제어할 법적 카드를 애초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고용노동부의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 “지속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 노동시장 구축”이라는 커다란 문구가 흐르고 있다. 양대 반도체 기업 종사자들의 땀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지만, 거액의 성과급은 ‘그 자리를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돌아간 측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극단적 불균형이 예상되는 AI 시대 노동시장의 풍경을 미리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자리를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노동이 ‘과대 존중’받고, 그 결과 나머지 노동은 철저히 소외감을 느낀다면? 이런 노동시장은 과연 지속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가? 장관의 무용담에 앞서 고용노동부가 진짜로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이현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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