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이군이 다 해먹었어?” 횡령범 몰린 MB, 반전 한마디
중앙일보
2026.05.26 13:00
2026.05.26 16:31
1965년 7월 현대건설 입사 후 본사에서 3개월을 일한 나는 경남 진해의 제4 비료공장 건설 현장 경리로 발령받았다. 다들 힘들게 살던 시절이라 경리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가불(假拂)이었다.
가불은 주로 일과가 끝나는 오후 5시 이후에 이뤄졌는데, 현장소장이 그걸 못마땅해했다.
태국 근무 시절의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이명박대통령기념재단
" 야 인마! 은행이 5시 이후에 돈 내주는 거 봤어? "
그런데 얼마 뒤 소장이 가불을 하러 왔다. 오후 5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 안 됩니다. "
소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 농담하지 말고 빨리 내놔 인마. 급한 일이야. "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 소장님. 5시가 넘으면 현금 지출이 금지돼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규칙을 스스로 깨신다면 누구도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
소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 질렀지만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소장은 결국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양 물러섰다.
정주영 사장의 전화가 걸려온 건 그해 12월 초였다.
" 이 군! 이 군은 태국으로 간다. 즉시 본사로 올라와야겠어. "
애초 해외 파견이 입사 목적이던 나에게도 뜻밖일 정도로 행운은 빨리 찾아왔다. 태국 발령은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 참여를 의미했다. 말레이시아 인근의 국경 도시 빠따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총연장 98㎞의 2차선 도로 공사였다.
1965년 12월 28일 중앙일 보 4면에 실린 현대건설의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수주 소식. 이 공사는 현대건설의 첫 해외 진출인 동시에 한국 건설 사상 첫 해외 수주였다. 중앙포토
현대건설은 서독과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16개국 29개사와 경합을 벌인 끝에 최저 낙찰가 522만 달러에 공사를 따냈다. 현대건설의 첫 해외 진출인 동시에 대한민국 건설 사상 첫 해외 수주였다.
당시 낙찰가는 현대건설 한 해 매출액보다 많은 돈이었다. 자연스레 태국 현장은 서울 본사보다 더 큰 조직이 됐다. 말단 경리 사원인 나는 관리부장, 경리과장 아래에서 일했다.
이역만리 방콕 공항에 발을 딛자 만감이 교차했다. 당시만 해도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앞섰고, 수도 방콕은 세계적인 관광 도시였다. 동료들은 주말마다 방콕을 찾기 바빴지만 나는 오로지 현장에 몰두했다.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현지인 직원들과 함께 경리 업무를 보던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이명박대통령기념재단
그러던 어느 날 실로 위험천만했던 그 사건이 터졌다.
" 미스터 리, 빨리 도망가! "
태국인 직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급히 고개를 들어 내다본 창밖, 험악한 표정의 남자들이 날카로운 군용 단도와 각목을 손에 쥔 채 몰려오고 있었다. 폭동이었다.
폭도들의 선두에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모집한 장비 기능공 중 상당수가 인천 지역 조직폭력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들이 이미 태국에 도착한 이후였다. 해외 공사 현장의 특혜를 독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취업’이었다.
가뜩이나 괄괄했던 그들이 술 한 잔 걸친 김에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미리 낌새를 챈 현장 간부들은 자동차를 타고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폭도를 제외한 한국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폭도들에게서는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중 한 명이 금고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 금고 열쇠 내놔! "
그런데 왜 그랬을까. 금고와 경리 장부를 지켜야겠다는 무모한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 못 내놓겠다. "
순간 뭔가가 내 목의 왼쪽을 휙 스쳐 지나가더니 뒷벽에 꽂혔다. 시퍼런 단도였다. 그걸 휘두른 폭도가 칼을 뽑더니 이번에는 내 목의 오른편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역시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그렇게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 허공에서 춤을 췄다. 아찔했다.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현지인 직원들과 함께 경리 업무를 보는 이명박 전 대통령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 전 대통령이다. 사진 이명박대통령기념재단
순간적으로 ‘열쇠를 넘겨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술 취한 폭도들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금고 안에 든 현찰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 직후 취한 행동은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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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박진석.김상진.김기정.왕준열([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