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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테크는 한물 갔다? AI시대 다시 거물 됐다

중앙일보

2026.06.0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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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인공지능(AI) 투자 지형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AI 랠리의 중심이 엔비디아와 HBM 공급사에서 서버·네트워크·광통신·스토리지·전력 반도체 등 데이터센터 인프라 기업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델 테크놀로지스·시스코·노키아·레노버·인텔·마이크론·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등 한때 성장 정체 기업으로 평가받던 ‘올드 테크’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9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들 7개 기업의 올해 평균 주가 상승률(5월말 기준)은 158%에 달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이번 레거시 테크 랠리의 가장 극적인 주인공은 델 테크놀로지스다. 핵심 동력은 단순한 실적 호조가 아니라 월가의 태도 변화였다. 그동안 델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유지해온 모건스탠리는 실적 발표 직후 “기존 투자 논리가 틀렸다(Our prior thesis was wrong)”고 인정했다. 투자의견은 ‘비중 축소’에서 ‘중립’으로 상향했고, 목표주가는 170달러에서 448달러로 대폭 높였다. 골드만삭스도 목표주가를 230달러에서 500달러로 끌어올렸다.

월가가 델을 다시 보기 시작한 이유는 ‘공급망 조달력’이다. 현재 AI 서버 시장은 주문이 부족한 시장이 아니다. 오히려 수요는 넘치지만 GPU·HBM·고성능 CPU 같은 핵심 부품이 부족한 공급 제약 환경이다. 누가 핵심 부품을 먼저 확보해 실제 서버를 납품할 수 있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델은 거대한 구매력과 수십 년간 구축한 공급망을 바탕으로 경쟁사보다 유리한 부품 조달 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때 ‘낡은 PC 회사’의 유산으로 여겨졌던 공급망이 AI 시대에는 핵심 경쟁력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델의 회계연도 2027년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87.5% 증가한 438억4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조정 기준(Non-GAAP) 희석 주당순이익(EPS)은 4.86달러로 전년 대비 214% 급증했다. 무엇보다 이번 분기 AI 최적화 서버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57% 늘어난 161억 달러를 기록했다. AI 서버 매출이 델의 기존 주력 사업이었던 PC 사업 매출(146억 달러)을 처음으로 넘어선 것이다.

수요도 일회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델은 1분기에만 244억달러 규모의 AI 서버 신규 주문을 확보했다. 분기 말 AI 서버 수주잔고(백로그)는 513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AI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이 실제 서버 주문과 납품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CPU 기반 전통 서버 사업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이번 분기 일반 서버 및 네트워크 장비 매출은 전년 대비 92% 증가한 85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러한 인프라 랠리는 델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스코와 노키아는 AI 데이터센터의 또 다른 병목인 ‘연결성’의 수혜주로 재평가받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칩만 많이 탑재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수천 개의 GPU와 서버가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처럼 움직이려면 서버와 서버, 랙과 랙, 데이터센터와 데이터센터를 초고속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 때문에 네트워크 장비와 광통신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시스코는 최근 AI 관련 주문 전망치를 기존 50억 달러에서 90억 달러로 상향했다. 올해 주가도 56% 상승했다. 휴대전화 사업을 접고 통신 네트워크 장비 기업으로 변신한 노키아도 2025년 광통신 전문기업 인피네라를 인수한 뒤 AI 데이터센터 간 초고속 연결 수요의 수혜를 받고 있다. 올해 주가는 124% 넘게 올랐다.

PC·서버 기업의 재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레노버는 오랫동안 PC 산업 침체의 그림자에 묶여 있었지만, AI 제품과 서비스가 분위기를 바꿨다. 올해 홍콩 항셍지수 구성 종목 가운데 최고 상승률을 기록한 배경이다.

인텔 역시 AI 인프라 투자 확대의 수혜주로 다시 거론되고 있다. 엔비디아의 50억 달러 투자, 신형 제온 칩의 일부 엔비디아 시스템 탑재, 애플 기기용 일부 칩 위탁 생산 예비 합의 보도 등이 이어지며 올해 주가가 211% 상승했다. 메모리 쪽에서는 단연 마이크론이다. 마이크론은 HBM 수요 폭증의 직접 수혜를 받으며 최근 12개월 동안 주가가 903% 넘게 상승했고, 시가총액이 5000억 달러에서 1조 달러까지 늘어나는 데 48거래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력 반도체에서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주목받고 있다. AI 서버는 전력 밀도가 높아질수록 전류와 전압을 정교하게 제어해야 한다.

어쩌면 1990년대의 낡은 이름들이 가장 현실적인 AI 인프라 기업으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가가 급등한 만큼 투자자가 확인해야 할 변수도 분명하다. 델 같은 서버 기업은 매출이 커져도 GPU·HBM·CPU 같은 고가 부품 비중이 높으면 이익률이 낮아질 수 있다. AI 서버 수주잔고가 실제 매출로 얼마나 빠르게 전환되는지, 매출 증가가 영업이익률 개선으로 이어지는지, 서버와 함께 스토리지·네트워크·보안 서비스가 얼마나 붙는지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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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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