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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처럼 구겨진 빨간 마티즈, 피해자 마지막 증언 “택시가…” [上]

중앙일보

2026.06.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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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베테랑-끝까지 잡는다
“전국 베테랑 형사들이 직접 꺼낸 단 하나의 ‘크라임 신’”

중앙일보와 경찰청이 협업해 사건 해결의 결정적 장면을 베테랑 형사들의 시선으로 기록합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형사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한 순도 100% 진짜 사건. 작은 티끌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베테랑들의 집념과 생생한 추적기입니다. 더중앙플러스 시리즈 ‘더 베테랑: 끝까지 잡는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345)’입니다.

※이 기사는 정국보 경위의 구술을 재구성해 작성했습니다.

‘번쩍’.
2014년 12월 18일 새벽. 불빛은 동공을 찌를 듯 날카롭게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곧 암흑. 김석춘(가명)씨가 본 것은 멀리 사라지는 차 위에서 번쩍하고 뿜어져 나온, 그 불빛 하나가 전부였다.

찰나의 불빛이 사라지자, 그제야 굉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몸이 붕 떴다가 내동댕이쳐졌다. 충격이 전신을 감쌌지만, 통증을 오래 느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빛이 헤집고 지나간 석춘씨의 눈앞은 어느새 가물가물해졌고, 곧 의식을 잃었다.

잠시 뒤. 정신을 간신히 차렸지만 손가락 하나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운전석 앞부분은 몸 바로 앞쪽으로 밀려 들어와 있었고, 왼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번쩍이는 빛줄기만을 남기고 떠난, 석춘씨의 차를 들이받은 ‘그놈’의 차는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이미 어둠 속 저 멀리까지 사라진 후였다. 브레이크 등은 단 한 번도 켜지지 않았다. 작은 머뭇거림조차 없는 뺑소니 질주였다.

크리스마스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은 날이었다. 인천 부평구 삼산동의 골목엔 며칠 전 내린 눈이 얼음장처럼 얕게 눌어붙어 있었다. 회색 공업사들이 줄지어 늘어선 새벽의 적막한 거리. 사람 그림자조차 찾기 힘든 공간.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간판만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뿌려댔다. 그 막막한 무채색의 풍경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유일한 색채는 골목 구석에 구겨진 채 처박힌, 구형 마티즈가 입은 빨간색이었다. 그 속에선 석춘씨가 온몸이 망가진 상태로, 희미한 의식의 자락만을 붙잡은 채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간 당직 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인천삼산경찰서 교통과 정국보 경위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현장을 둘러봤다. 밤샘 근무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지만 운전석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빨간 마티즈의 모습을 보곤, 순간 잠이 달아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목숨 건진 게 천만다행이구먼.”

목격자 없음. 폐쇄회로(CC)TV 없음.
참혹한 현장에 남겨진 거라곤 부서진 마티즈 한 대, 그리고 들것 위에서 신음하는 석춘씨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뭐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석춘씨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 그에 대비되는 꾀죄죄한 패딩과 작업복 바지. 곳곳에 번져 나온 핏자국. 옷 속에 있음에도 확연히 도드라지는,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여버린 왼팔과 퉁퉁 부어오른 오른쪽 다리. 모든 것들이 사건 현장의 참혹함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물을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정 경위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선생님, 들리세요? 혹시 기억나는 거 있으시냐고요!”

석춘씨는 겨우 한쪽 눈을 떴다.

“택, 택시… 였던 것 같은데요….”
“택시요? 왜요? 뭔가 봤어요?”
“순간 확 들이받아서… 잘은 모르겠는데. 차 위에서 불빛이 번쩍했어요. 서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어….”

그게 전부였다. 번호도, 색깔도, 차종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차.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 말을 끝으로 구급차 문이 닫히고 사이렌 소리도 멀어졌다. 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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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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