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서 새로운 용어를 쓰는 건 대개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질 때, 다른 하나는 원치 않는 결론을 가리려고 의도적으로 새 이름을 붙일 때다. 얼마 전 정부 쪽에서 나온 ‘3고 성장통’은 어디에 해당할까.
성장통은 아프지만 좋은 현상이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성장으로 보상된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렇다고 아무 통증이나 다 견뎌야 할 성장통은 아니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이 과연 그런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통증을 상쇄시켜줄 성장 시나리오를 보자. 지난 3일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전망엔 평소 보기 어려운 숫자가 담겨 있다. 한국경제 전체의 물가를 반영하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가 올해 7.6%로 산출됐다. 예년의 2~3% 수준을 크게 웃돈다. 이에 따라 올해 명목 GDP 성장률은 10.4%로 전망된다. 21세기에 명목 성장률이 두 자릿수였던 때는 한일 월드컵의 해인 2002년과 금융위기의 기저효과를 본 2010년뿐이다. 정부가 치적으로 내세우려 할 만하다.
박경민 기자
하지만 가계의 실질소득이 개선되고 내수기업의 형편이 나아지는 건 별개의 문제다. 체력이 아닌 체온이 급히 오를 때 그렇다. OECD 회원국 중 우리보다 GDP 디플레이터가 높은 곳은 터키(27.6%)뿐이다. OECD 가입을 진행 중인 나라까지 보면 아르헨티나(27.3%), 불가리아(8.4%), 페루(7.9%), 루마니아(7.9%) 정도다. 인플레와 통화가치 하락을 겪고 있는 곳들이다. 루마니아를 제외한 이들의 올해 명목 성장률은 두 자릿수에 이른다. 높은 디플레이터와 명목 성장률을 공유하지만, 선진공업국인 한국에게 어울리는 클럽은 아니다.
인플레 국면에서는 기업 실적과 주가가 명목 기준으로 부풀려질 수 있다. 인플레로 몸살을 앓은 터키에서 이스탄불100 지수가 2020~25년 7배 넘게 상승한 게 대표적 사례다.
높은 디플레이터엔 양면성이 있다. 반도체 수출단가 상승이 국부를 키우는 빛이라면, 고환율과 인플레로 인한 생산비용의 급등은 외형만 부풀리는 그림자다. 전자 덕분에 나라경제 전체의 덩치가 커져도, 후자 때문에 내수 기업과 가계의 비용 부담은 무거워진다. 정반대의 두 얼굴이 하나의 지표 안에 기괴하게 동거하고 있다.
어쨌든 성장 기대가 높아지면 자본의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다. 5월의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채권시장에선 금리 인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금리 상승이 위기의 신호가 아니라 성장에 대한 기대와 자금 수요의 증가에 의한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저공비행하던 자연이자율, 즉 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을 지속케 하는 균형금리가 높아진다면 반가운 일이다.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인 잠재성장률의 하락이 멈추거나 반등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미국의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이 2013년 구조적 장기 침체론을 폈을 때 주목한 것도 자연이자율 하락이었다. 이게 일본처럼 바닥을 기면 제로금리 정책을 펴도 효과가 없다. 금리가 평소 어느 정도 높아져 있어야 위기 때 이를 낮춰 대응할 방어력이 생긴다. 고금리 성장통은 그 플러스 효과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좋게 봐줄 수 있다.
문제는 금리 상승이 성장 기대감보다 물가 불안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이때 고금리는 성장의 과실이 아니라 뒤늦게 날아온 인플레의 청구서다. 그 통증은 2000조원에 가까운 가계부채의 상환 부담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한 소비 침체가 경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자영업자와 중소·영세기업 등 경제적 약자도 어려워진다.
고금리처럼 고물가에도 온통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약간의 인플레는 경제의 톱니바퀴를 부드럽게 움직이게 해준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1918~2002)이 말한 ‘윤활유 효과’다. 그는 몇 %가 바람직한지 말하진 않았는데,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2% 내외를 관리목표로 잡는다.
고물가를 성장통쯤으로 보는 이는 아마 2010년 우리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이 서울에서 연 공동 심포지엄의 제안을 떠올리는지 모른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인플레 관리목표를 4%로 높이자고 했다. 당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지 2년 된 폴 크루그먼이 이에 동의하면서 큰 논쟁으로 번졌다. 결국 물가 안정론의 벽을 넘진 못했다. 윤활유를 들이붓는다고 차가 빨리 가진 않는다.
인플레의 해악은 직관적이어서 누구나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실질소득을 깎고, 불확실성을 키워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킨다. 금리 상승과 가격 신호의 교란을 통해 성장 잠재력까지 해친다. 국채 가치를 하락시켜 국채 보유자인 민간에서 정부로 소득을 이전시키기도 한다. ‘인플레 택스’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다. 현재 발행잔액 1267조원의 국고채의 평균 잔존만기는 약 13년이다. 만기까지 매년 2.5%의 인플레를 가정하면 4분의 1 이상인 348조원이 현재 가치에 비해 줄어든다. 우리나라 국방예산 5년치를 웃도는 규모다.
박경민 기자
고환율의 고통은 더 크다. 수입물가를 끌어올려 인플레를 자극하고, 국민의 생활수준과 대외 구매력을 두루 떨어뜨린다. 가계에 대한 조용한 수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도 피해자다. 올해 반도체 호황과 주가 상승을 근거로 정부가 전망한 세수는 415조원이 넘는다. 명목금액으론 기록적 세수다. 그런데 이를 달러로 환산하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올해 세수 전망치에 5월 평균환율(1490.11원)을 적용하면 2788억 달러쯤 된다. 과거 세수가 가장 많았던 2022년엔 평균환율 1291.95원 기준으로 3064억 달러였다. 세수가 원화로는 늘었지만, 달러로는 4년 전에 비해 되레 9% 감소한 것이다. 인플레까지 반영하면 차이는 더 벌어진다. 고환율이 이어질수록 달러 기준 세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9일 현재 원-달러 환율은 1510원~1520원대를 오간다.
세금은 국내에서 걷어 쓰는 것이니 상관없다고 하면 절반만 맞는 말이다. 정부도 중요한 수입 주체다. 전투기와 미사일을 들여오고, 비축유나 원자재도 수입한다. 해외공관 경비뿐 아니라 국제기구 분담금도 내야 한다. 환율이 높아지는 만큼 국가의 대외 구매력은 약화한다. 세수 증가로 나라가 부유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부분적으로 착시다.
중동전쟁이 끝나면 환율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정부 고관의 인식도 안이하다. 고환율을 성장통이라 해놓고 외부변수에 기대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환율은 전쟁 이전에 이미 1450원 선으로 올라 있었다. 전쟁이 끝난다고 그 밑으로 떨어질 보장이 없다. 구매력평가(PPP)에 비해 환율이 과도하게 올랐으니 언젠가 정상화된다는 주장도 안 먹힌다. 흔히 PPP환율의 참고로 인용되는 빅맥 지수는 현재 984.5원이다. 실제 환율과의 괴리는 35% 안팎에 이른다. 이 간격이 쉽게 좁혀질까. 환율은 균형점에서 한번 멀어지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한참 걸린다. 그러는 동안 고환율은 물가와 임금 구조를 바꾼다. 먼저 수정되는 건 환율이 아니라 PPP다.
미국의 협조개입을 기대하는 것도 언감생심이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1992년 조지 소로스와 함께 영국 파운드화를 무너뜨린 경험이 있다. 시장개입의 무력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가 협조개입에 선뜻 응하겠나. 이에 더해 연간 200억 달러로 상한을 정하긴 했지만 총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도 환율엔 부담이다.
고환율이 달러 부족 탓이 아니라며, 경상수지 흑자를 강조하는 정부 설명엔 구멍이 보인다. 거액의 흑자 덕에 달러가 충분하다는 건 장부상 그렇다는 얘기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1~4월 경상수지 흑자는 약 1027억 달러다. 이 가운데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소득수지 흑자 중 투자소득 68억 달러는 대부분 재투자돼 국내로 들어오지 않는다. 기업들이 수출대금으로 받은 외화를 환전하지 않고 들고 있는 경우도 충분히 예상된다. 또 같은 기간 내국인의 대외자산 취득을 보여주는 금융계정 순자산은 909억 달러 증가했다. 그렇다면 달러의 캐시 플로우는 마이너스일 가능성도 있다.
‘경상수지가 흑자이니 괜찮다’는 위안보다 ‘흑자임에도 환율이 오른다’는 현실이 더 서늘하다. 이는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진 게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또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문도 크다. 흑자가 지속된다는 건, 경제 전체로 볼 때 저축에 비해 투자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투자가 부진하면 성장을 이어가기 어렵다. 외환위기의 트라우마 탓에 경상수지 흑자를 합리화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본질적인 저축-투자의 불균형까지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시장엔 ‘테일 리스크’라는 게 있다. 확률은 극히 낮지만, 한번 일어나면 엄청난 피해를 주는 위험이다. 이를 경계해야 할 관료가 낙관적인 ‘3고 성장통’ 노래를 부른다. 최악에 대비해야 할 사람이 최선을 가정하고 있다. 관료의 임무는 희망을 파는 게 아니라 위험을 계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