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페스티벌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런데 최근 화제가 되는 축제들의 무대는 도시가 아니다. 숲속에 무대를 세우고, 계곡 옆에 텐트를 치고, 몇 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산골 마을로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과거라면 흥행의 걸림돌이었을 불편함이 왜 새로운 매력이 됐을까.
살둔마을은 '사람이 기대어 살만한 둔덕'이라는 뜻으로 오래전부터 전쟁도 모르고 지나갈만큼 깊은 산골이었다. 신스 아시아는 여러 지역 답사를 통해 축제를 가장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지역으로 이곳을 택했다. 사진 신스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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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음악이 산골을 택한 이유
강원도 홍천군 내면의 살둔마을. 높은 산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어 은둔의 땅으로 불리던 ‘오지(奧地)’다. 일부러 찾아오기도 쉽지 않은 이곳에 세계 각지에서 뮤지션과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12일부터 사흘간 열린 음악 페스티벌 ‘신스 아시아’ 현장이다.
이들이 선보이는 것은 흔히 떠올리는 전자음악과는 다르다. ‘쿵짝’거리는 비트나 멜로디 대신 일상과 자연, 종교의식 등에서 영감을 얻은 소리를 탐구한다. 기존 음악의 규칙을 벗어난 이른바 ‘익스페리멘털 뮤직(실험 음악)’이다.
신스 아시아는 고정호 기획자와 DJ 출신인 김시진 공동 대표가 만든 실험 음악 페스티벌이다. 지난 12일부터 사흘간 26팀의 뮤지션이 공연을 펼쳤다. 사진 신스 아시아
고정호 신스 아시아 기획자는 “단순한 비트나 전자 음악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까운 사운드”라면서 “귀가 아닌 온몸을 전율시키는 경험을 위해 수많은 곳을 답사 후 이곳을 택했다”고 말했다. 아직 국내에는 생소하지만, 소리 자체가 울림과 치유를 끌어내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를 위해 독일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높은 수준의 청음 환경을 조성했다. ‘울어야 하는 음악’이라 불릴 만큼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위해 주최 측은 고립된 산골을 무대로 선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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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편한 곳이 가장 ‘힙한 곳’이 됐나
2018년부터 시된 디 에어 하우스는 자연 속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로 48시간동안 음악 공연과 요가,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사진 크림
관객들이 기꺼이 먼 길을 찾는 이유는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감각 때문이다. 음악 페스티벌 ‘디 에어 하우스’는 9년째 산과 들, 섬을 무대로 축제를 열고 있다.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 강원도 춘천시 남이섬에서 열린 행사에는 약 1만 명의 관람객이 행사장을 찾았다. 박민규 디 에어 하우스 대표는 “잔디를 밟고 나무 사이를 오가며 듣는 음악의 여운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이라면서 “낮과 밤이 바뀌며 달라지는 온도와 공기의 질감까지 느낄 수 있도록 48시간 내내 공연을 한다”고 말했다. 2박 3일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공연 속에서 참가자들은 별을 보며 춤추고 새벽 해를 맞는다.
이곳에서는 이동 거리에 따른 불편함마저 낭만으로 받아들여진다. 평소 음악·영화 축제를 찾아다닌다는 직장인 오유영(32) 씨는 “오히려 며칠 여행 간다는 생각으로 일정을 짠다”며 “몇 시간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절을 즐기는 경험에 가깝다”고 말했다. 들여다보면 축제를 소비하는 시간 단위 자체가 달라졌다. 도심에서 열리는 공연이 몇 시간 머물다 돌아가는 형태라면, 지역 페스티벌은 1박 2일 이상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근처 지역을 함께 경험하려는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디 에어 하우스는 웰니스를 주제로 캠핑, 요가, 명상, 에어로빅, 공예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자연 속에서 균형을 찾는 시간을 제안한다.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서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고석정에서 이달 12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DMZ 피스트레인’은 캠핑존을 운영하고, 아침 산책·다도·글짓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를 마련했다. 디 에어 하우스 역시 ‘웰니스’를 테마로 명상· 요가·전시·운동회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관객들이 음악과 휴식을 오가며 축제를 즐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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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부터 해안까지…장소가 새로운 ‘헤드라이너’ 됐다
사실 자연을 무대로 삼는 음악 축제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969년 미국 농장에서 열린 우드스톡을 시작으로 코첼라,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일본의 후지록 등 세계적인 음악 축제들은 오래전부터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며칠간 머무는 경험을 제공해 왔다.
로마 시대 원형극장 건설에 쓰인 석회암 채석장을 공연장으로 활용한 크로아티아의 '게이트 오브 아가타' 페스티벌. 사진 Gates of Agartha
그런데 코로나 19 이후 등장한 음악 축제들을 보면 ‘장소성’을 정체성으로 끌어안는 모습이다. 유럽 일대에서는 고대 그리스 신전과 폐채석장, 아드리아해 해안 등 특별한 장소를 무대로 한 축제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이제 음악만이 아니라 장소 자체가 축제를 찾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른바 특정 목적지를 찾아 떠나는 ‘데스티네이션 페스티벌(Destination Festival)’의 확산이다.
올해 5월 처음 열린 이탈리아의 ‘아우라 페스티벌’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고학 유적지를 일렉트로닉 음악 무대로 탈바꿈했다. 크로아티아의 ‘게이트 오브 아가타’는 2000년 된 로마 시대 석회암 채석장에서 공연을 연다. 높이 50m 암벽이 사방을 둘러싼 공간은 장관을 이루는 동시에 독특한 음향 효과를 만들어낸다. 포르투갈의 ‘야드 페스티벌’은 하얀 석회암 절벽을 배경으로 공연을 펼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성과 해안공원, 포도밭까지 지역 곳곳을 축제 공간으로 활용한다.
2022년 시작된 포르투갈의 '야드 페스티벌'. 세투발 지역의 거대한 자연 석회암 절벽을 배경으로 4일간 음악 공연이 펼쳐진다. 사진 YARD Festival
그동안 음악 축제의 성패는 누구를 무대에 세우느냐에 따라 갈렸지만, 이제는 독특한 기획과 세계관 싸움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이런 흐름에서 장소는 공연의 배경이 아니라 그 기획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콘텐트가 됐다. 앞서 살펴본 축제들이 특색있는 마을이나 역사 속 숨겨진 장소의 지리적 맥락을 강조하는 이유다. 관객들 역시 공연 관람을 넘어 일상과 다른 감각을 체험하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 음악 축제의 경쟁력은 누가 무대에 오르느냐만큼 어디에서, 어떤 경험을 선사하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