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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숭유억불’ 속 폐허된 왕실 사찰, 어떻게 세계유산 후보 됐을까

중앙일보

2026.06.16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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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24일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석가모니의 탄생일로 중생에게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을 전하려 부처님이 세상에 온 날로 여겨져요. 이 특별한 날을 맞아 전국 곳곳 거리와 절은 형형색색 연등으로 불을 밝히죠.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며 수행하는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전해져요. 고구려 소수림왕(372년)부터 백제 침류왕(384년), 신라 법흥왕(527년) 순으로 불교를 공인, 단순 종교를 넘어 통치 이념으로도 작용했죠. 당시 불교는 국가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며 왕권 강화는 물론 백성들의 정신적 통합을 이루는 데도 활용됐다고 합니다. 신라 승려 원효대사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을 강조하며 불교를 대중화했죠.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따르면 당시 회암사는 262칸 규모의 건물과 수십 점의 불상이 조성된 대규모 사찰이었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따르면 당시 회암사는 262칸 규모의 건물과 수십 점의 불상이 조성된 대규모 사찰이었다.

삼국시대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불교는 고려시대에도 그 기조를 이어나갔어요. 국교로 자리 잡으며 왕실은 사찰을 세우고 각종 행사를 열었죠. 특히 나라가 어려울 때 이를 극복하는 정신적인 힘이 됐는데요. 거란 침입 때 초조대장경, 몽골 침입 때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죠. 고려의 정신적 기둥이던 불교였지만,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일부 사찰과 승려들이 지나치게 권력과 재산을 축적하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정화하려는 노력조차 위축되면서 쇠퇴하게 됐어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 사대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했는데 이를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라 합니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은 불교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에 대해 회암사지박물관 최석현 학예사는 "제도적으로는 사찰의 토지와 노비가 환수되고 종파가 통합되는 등 큰 압박을 받았으나,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왕실 내부의 사적 신앙과 민간의 기복 신앙이 결합하여 실제로는 끊이지 않는 불교 예술과 건축 문화의 토대가 됐죠"라고 설명했습니다.
회암사지는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됐으며 이후 출토 유물을 바탕으로 2012년 회암사지박물관을 개관했다.

회암사지는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됐으며 이후 출토 유물을 바탕으로 2012년 회암사지박물관을 개관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는 억제 정책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간 불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에요. 고려 말 우왕 4년(1378) 선종 승려 나옹이 중창하면서 본격적으로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회암사는 조선 중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고려 말 학자·문인 이색의 『목은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따르면 당시 회암사에는 262칸 규모의 건물과 수십 점의 불상이 조성됐죠. 목은 이색은 ‘아름답고 장엄하기가 동방에서 최고’라고 회암사에 찬사를 보냈으며, 인도 승려 지공은 회암사 입지를 두고 “삼산과 양수 사이의 형세가 천축국 나란타사와 같다”고 극찬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당시 일반 사찰과는 다른 구조를 갖춘 회암사는 경사진 지형에 9개 단지를 계단식으로 조성한 형태로 남북 축선에는 보광전·설법전과 같은 주요 불전이 배치됐죠. 가장 북쪽에는 정청과 동·서방장 등 정치적 기능을 가진 공간도 존재했는데, 이는 왕실 후원을 직접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궁궐 내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됐다고 기록된 청기와가 대량 출토되기도 했죠. 청기와는 중국 명나라 황실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최고급 건축 자재로 제작비용이 막대해 궁궐이나 왕실 관련 건축물에만 사용할 수 있었어요.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청기와는 회암사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방증하죠. 터만 남았지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회암사지는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됐으며 이후 출토 유물을 바탕으로 2012년 회암사지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금탁’에는 ‘조선 국왕과 왕현비,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 불사를 후원한다’고 새겨졌다.

회암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금탁’에는 ‘조선 국왕과 왕현비,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 불사를 후원한다’고 새겨졌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거대한 모형이 관람객을 맞아줘요.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회암사 배치도로 마치 경복궁을 연상케 합니다. 실제로 회암사지에서는 궁궐에나 쓰인 청기와, 용두(龍頭), 봉황 무늬 기와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죠. 최석현 학예사는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국찰(國刹)'이자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원찰이었습니다. 인도 출신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나옹의 제자이자 태조가 왕사로 책봉한 무학대사 등 당대 최고의 고승들이 머물며 한국 불교의 사상적·문화적 정점을 찍었던 중심지였죠"라고 소개했죠.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청동금탁'은 사찰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인데요. 이 유물에는 태조 3년(1394)'이라는 날짜와 함께 '조선 국왕과 왕현비,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 불사를 후원한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죠. 회암사지 북쪽 능선에는 무학대사의 유골을 봉안한 무학대사탑(보물) 등도 남아있어요. 이런 유물을 통해 조선 초기의 불교가 탄압 대상만은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죠. 세종 역시 공식적으로는 억불 정책을 유지했지만, 왕실 중심의 불사를 묵인하거나 제한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신하들의 회암사 지원 반대 상소에도 세종은 회암사의 중수를 계속 허락했다고 하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은 회암사 위상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효령대군은 1434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했는데 이와 관련한 유물 '정통 1년(1436)'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며 그의 주도로 일이 진행됐다는 게 입증됐죠. 성종 때도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증축됐고요.
최고급 건축 자재로 제작비용이 막대해 궁궐이나 왕실 관련 건축물에만 사용했던 청기와가 출토됐다.

최고급 건축 자재로 제작비용이 막대해 궁궐이나 왕실 관련 건축물에만 사용했던 청기와가 출토됐다.

이후 13대 왕 명종의 어머니이자 중종의 비 문정왕후 덕에 회암사는 조선 불교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회암사에 석가·미륵·아미타·약사여래를 각각 100점씩 제작한 대규모 불사를 봉안했고, 불교 중흥 정책도 추진했다고 전해져요. 또 회암사에서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법회인 ‘무차대회’까지 계획했는데, 이는 불교를 다시 국가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고 평가받죠. 이에 성균관 유생들은 상소를 올려 회암사 불사를 비판한 것은 물론 나아가 불교 중흥 정책 철회를 요구했고요.

이렇듯 왕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교의 위상은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이 증명해줍니다. 왕실 관청 이름이 적힌 그릇과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들이 다수 출토돼 왕실 물품이 회암사에 직접 공급됐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공식적으로 불교를 억제했지만,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는데 최 학예사는 "유교가 통치를 위한 이념이었다면, 불교는 왕실 가족 개개인의 내면적 고통을 치유하고 조상의 명복을 비는 안식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비와 후궁들이 가문의 안녕과 자손의 번창을 위해 불교에 의지하면서 끈끈한 유대가 유지됐죠"라고 강조했어요.
회암사지에서는 갑옷을 갖춰 입은 장수 모습의 잡상, 사람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한 잡상 등이 출토됐다.

회암사지에서는 갑옷을 갖춰 입은 장수 모습의 잡상, 사람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한 잡상 등이 출토됐다.

그러나 회암사의 번영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불교 중흥을 이끌던 문정왕후 사후,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려는 유생들의 거센 탄압과 방화 등이었다고 추정돼요. 당대 지배세력의 요구와 더불어 강력한 왕실 후원자가 사라지면서 유교 중심 사회의 이념적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거죠." 최 학예사 설명처럼 조선 중기로 접어들며 성리학 중심 질서가 강화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회암사의 운명도 급격히 기울어졌습니다.

1595년 『선조실록』에 "회암사는 불에 타 옛터만 남았다"고 기록됐으며, 조선 후기 문인 백암 성총은 ‘회암사’라는 시를 통해 폐허가 된 절터의 쓸쓸함을 표현했죠. 최 학예사는 "왕실 건축을 직접 상징하는 '용두, 토수'와 '용문, 봉황문 막새', '잡상' 등 궁궐 수준의 기와 유물을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유물로 꼽을 수 있다"며 "유교 국가에서도 왕실의 비호를 직접 누렸던 회암사의 권위를 보여주는 동시에 파손된 채 발견돼 조선 중기 이후 급격한 쇠락의 역사를 증명합니다"라고 전했어요.

한동안 잊혔던 회암사는 1997년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회암사가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고려 말과 조선 초 국가 권력과 불교가 만나는 핵심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죠. 특히 고려 불교와 조선 왕실 문화, 동아시아 불교 교류가 중첩된 복합 유산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회암사지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고 해요.
고려 불교와 조선 왕실 문화, 동아시아 불교 교류가 중첩된 복합 유산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현재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회암사지 터 일대.

고려 불교와 조선 왕실 문화, 동아시아 불교 교류가 중첩된 복합 유산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현재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회암사지 터 일대.

"회암사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고 유적이자 동아시아 선종 사원의 전형을 현재까지도 오롯이 전달한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아요. 즉 땅속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우리 역사 속 중요한 한 페이지였던 회암사의 역사를 되새기고, 그 과정을 통해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역사문화의 한 획을 긋는다는 점에서 회암사지는 인류의 문화를 기억하는 역사 전달 공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하죠."

최 학예사 말처럼 회암사지는 숭유억불이라는 정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조선 초기의 복합적인 현실을 보여줍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동시에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했고, 왕실은 불교를 통해 권위를 유지하려 했죠. 회암사는 그 모순과 공존의 역사가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공간으로 현재는 세계유산 등재를 향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가고 있죠. 회암사지박물관 방문 시 '회암사 대가람' 전시물을 주목하라는 최 학예사는 "'회암사 대가람'은 가장 찬란했던 때 회암사의 모습을 영상과 모형을 통해 복합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실감영상공간인 '360 다면실감'에서는 기록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나 화려한 영상미로 회암사의 문화예술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죠. 조선 초기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역사와 가치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회암사지와 바로 옆 회암사지박물관에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회암사지박물관
장소: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및 설날 당일 휴관, 입장마감 오후 5시)
입장료: 성인 2000원, 청소년 1500원, 초등학생 1000원, 유아 및 노인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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