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을 사용하면서 사라진 인간의 특성 중 하나는 ‘수줍음’과 ‘민망함’이다. 이전에는 책을 내려는 이들이 자기가 짠 목차가 괜찮은지, 문장이 어설프진 않은지 동료·가족·편집자에게 물었다. 편집자가 누군가에게 책을 내자고 제안하면 “제 글을 누가 읽겠습니까”라는 겸손 섞인 답이 돌아왔고, 투고할 때도 마치 심판대에 선 사람 같은 초조함을 내비쳤다. 이런 겸양은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결핍 속에서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이를 메우려고 정진하겠구나 하는 기대감까지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이런 사람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자취를 감췄다. 대신 “저 책 썼어요. 얼마 안 있어 나올 거예요”라는 신인간이 출현했다. 그들에게서는 문법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더 나은 문장을 썼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부끄러움, 부족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는 후회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수줍게 투고하던 필자들 사라져
인간 사유는 미흡할 수밖에 없어
쓰기는 오늘의 나를 인내하는 법
김지윤 기자
글쓰기에는 본래 수줍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수줍은 삶의 노래는 확신에 찬 건조한 글과는 다르다. 학자들은 글을 쓸 때 전통적으로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쓰지 않고, 자기 본위적 동사도 삼갔다. 새로 발표하는 연구는 선학들의 어깨를 딛고 선 것이므로 내 것이라 말하기 겸연쩍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에는 ‘차마’라는 단어가 유보조항처럼 따라붙었고, 글에서 자기 책을 일컬어야 할 때면 ‘졸저’라는 말을 썼다(한편 요즘 편집자들은 졸저라는 말을 불편해하며, 저자들은 자신의 책을 공식 지면에서 당당히 추천해 민망함은 오히려 읽는 이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자기주장을 드러낼 때 그 방식이 ‘겸손’이어야 한다는 것은 고대부터 인류 문화에 유전자처럼 새겨져 온 것이다. 지성의 최정점에 섰던 플라톤은 방대한 저술 속에서 자기 이름을 드러낸 일이 세 차례에 그쳤으며, 늘 스승 소크라테스를 내세우면서 자신은 뒤에 숨었다. 이것이 수천 년간 지속될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대화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역시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국가』에서 글라우콘·아데이만토스 등의 제자가 어떤 주제에 대해 스승에게 논증해줄 것을 청하면,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걸 하겠냐는 말부터 밑자락에 깐 뒤 최대한 우회하는 방식으로 진리에 가닿으려 애쓴다. 진리는 본성상 보이거나 만져질 수 없으니 이를 입증하려는 자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역사는 길디길다. 파블로 네루다가 회상록을 펴내면서 ‘내가 살아온 날을 고백하다’라고 화려한 제목을 붙이자,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고백록에서조차 일인칭을 과하게 드러내는 네루다에게는 아마 메시아가 임하지 않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글은 기본적으로 승리를 가져다줄 수 없다. 인간의 경험과 사유는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기에 허점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히며 다음엔 채우리라 다짐한다. 따라서 ‘확신에 찬 저자’는 형용모순이며, 대개는 글이 겨우 제 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은 ‘나’란 존재가 인류 역사의 모서리에 자리한 파편이라고 여기곤 했다. 하지만 기계에 의존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미흡한’ 존재들은 급속하게 자취를 감추고, 기계의 보조와 매체의 후광에 싸인 저자들이 가볍고 빠르게 치고 나오고 있다.
인간은 점점 쓰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왜 글에 삶의 대부분을 거는 것일까. 흔히 쓰기는 읽기와 한 쌍처럼 언급된다. 하지만 ‘읽기’는 읽는 순간 그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리는 면이 있다. 지식과 느낌 등이 재빨리 기억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반면 ‘쓰기’는 계속해서 우리를 현재에 붙들어둔다. 다시 말해 쓰고 있는 이상 내가 인지하고 느낀 것들은 과거로 넘어가지 않고 현재에 오래 머문다. 쓰는 과정에서는 순수한 현재가 빛난다.
글쓰기는 실패의 연속이다.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아를 깎아 둥글게 만들고, 몸으로 체험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안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유보하는 태도를 길러주며, 자칫 자기비하의 경계선에서 겸손함을 찾아, 궁극적으로 스스로가 작다고 인식해 너머의 세계에 가닿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부족한 글쓰기 능력은 끊임없는 손질 작업을 하도록 내몰면서 지성의 상대성을 발견하게 해주며, 오늘을 인내하도록 인간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