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투기꾼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는 외환시장이다. 원-달러 환율이 1560원을 넘자 외환 당국이 환율 상승의 주범으로 환투기 세력을 언급했다.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차익 실현에 나서며 달러를 대거 사들인 점도 있지만, 일부 투기적 거래가 환율 쏠림 현상을 가속했다는 것이다.
원·달러 환율이 1555.2원에 거래를 시작한 지난 8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은행 환전소 모니터에 달러 원화 구입가가 1600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뉴시스
환율과 관련한 외환 당국의 범인 찾기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말 환율 급등 당시에는 해외 주식 투자에 나선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이 환율을 끌어올린 주범으로 몰렸다. ‘달러 모으기’에 나서며 서학개미 포섭을 위한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까지 만들 정도였다. 세계 최고 상승률을 기록한 코스피의 고공행진 속에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이 국내 증시로 ‘귀순’했지만 환율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중동 전쟁이 가져온 시장의 불확실성은 원화 약세와 관련해 외환 당국이 숨을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됐다. 지난달까지 국내 주식을 118조원 넘게 팔아치운 외국인의 매도 공세로 환율은 치솟았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에 동티라도 날까 달러를 사들이며 자본 유출에 나선 외국인을 막아서지도 못했다. 외국인이 끌어올린 환율에 망연자실한 듯했던 외환 당국이 칼을 빼 들고 잡겠다고 나선 범인이 환투기 세력이다.
외환 당국의 의지는 결연하다. 환율을 교란하는 환투기나 불법 거래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과 한국은행이 14년 만에 외환공동검사에 나설 정도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를 상대로 환투기에 나섰던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창업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부가 ‘환투기 세력’을 운운하고 나설 정도면 외환시장에서 환율 교란 행위로 간주할 만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외환 당국이 시장을 교란하는 불법 거래에 해당한다고 언급한 사례를 보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외환 당국이 외환 불법 거래에 해당할 수 있다고 꼽은 것 중 하나가 수출입 기업의 ‘리드 앤 래그(Lead & Lag)’다. 리드 앤 래그는 환율 변동을 예상해 달러 결제나 수취 시점을 앞당기거나 늦추는 것이다. 환차익을 노린 기업들이 환율 상승에 편승해 수입 대금 결제를 지나치게 앞당기거나 수출 대금을 너무 늦게 수령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게 당국의 주장이다.
환율 뛰자 환투기 세력까지 운운 외환당국은 근본 문제 외면한 채
가상의 투기꾼 잡으려 헛발질 중
달러 한 푼이 아쉬운 당국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겠지만 이는 수출입 기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리스크 헤지(위험 관리)다. 수입 기업 입장에서는 환율이 오를 것 같으면 선지급해 부담을 줄이고, 수출 기업의 경우 늦게 대금을 받아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버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손실 최소화, 수익 극대화’를 위한 전략에 시장 교란과 불법 거래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건 어이없는 접근이다.
그뿐만 아니다. 외환 당국의 시각대로면 밤사이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환율이 오르는 것을 뉴스나 유튜브 등에서 보고 달러 매수에 나서는 이들도 환투기꾼이 될 판이고, 당국이 시중은행에 판매 자제 요청을 한 달러 예금에라도 가입하면 환투기꾼이란 오해를 사기 딱이다.
외환시장의 ‘투기꾼 프레임’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집값을 잡겠다며 다주택자를 비롯해 비거주 1주택자까지 투기꾼으로 몰아가며 부동산 시장과의 전쟁에 나선 것과 닮은꼴이다. 부동산 시장이든 외환 시장이든 문제를 야기한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정책적 한계를 덮으려 희생양을 찾아 공격하며 그저 ‘누군가의 탓’으로 일관하고 있다. 불편한 가격 변수를 억누르려는 시도도 마찬가지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7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과 같은 환율 급등은 걱정스러운 수준이지만 사실 2021년 이후 연평균 환율은 꾸준히 올랐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이 떨어진다는 방증이다.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저성장 기조로 빠져드는 상황에 나랏빚까지 늘어나며 원화의 몸값도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가계와 기업의 해외 투자가 늘어나며 달러 수급 부족은 만성화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착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지만 일시적인 수급 개선과 함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장기 대책을 마련해야만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어쩌면 외환 시장을 교란하고 왜곡하는 건 ‘투기꾼 프레임’에 갇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당국일지 모른다. 상대가 없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섀도 복싱’을 하듯, 있지도 않은 가상의 투기꾼을 잡겠다고 헛방을 날리며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최근의 고환율이 한국 경제의 취약성이 아니라 ‘성공의 역설’이라던 호언이 무색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