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이 식탁 위에 놓인 달걀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류 인플루엔자(AI)나 광우병 사태와 같은 일로 정부와 국민 간 신뢰의 위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고 그 미만이라 해도 특정 위험물질(SRM) 수입은 안 됩니다. 미국 도축장에 대한 감시 감독도 필요합니다. "
이른바 ‘광우병 시위’ 과정에서 수없이 들었던 주장이었다. 대통령이던 나는 그 주장을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 자리에서 또 한 번 들어야 했다.
게다가 그 대표는 오랫동안 나와 같은 당에 몸담았던 손학규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2011년 6월 27일 청와대에서 조찬회담을 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에 이끌려 나와 함께 14대 총선 때 보수 정당 간판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그다. 그랬던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나, 박근혜 전 대표와 경쟁하다가 돌연 탈당하더니 결국 상대 진영에 투신했다. 그러더니 그 정당의 대표가 돼 나와 마주 앉은 상황이었다.
착잡했다. 그는 단순한 옛 ‘직장 동료’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다음 대통령 자리를 맡길 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까웠다. 우리는 우리만이 공유하는,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워싱턴서 둘만의 정기모임…“형님, 나 밥 좀 사줘요!”
" 형님, 우리 둘이 정기모임이나 하나 만들까요? "
1999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손학규가 깜짝 제안을 했다.
"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 아닙니까? 그냥 보내버리면 아깝잖아요. 주 1회 정기적으로 모여서 이슈에 관해 토론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나누면 어떨까요? "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다운 제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손학규와 나는 매주 만나 함께 식사하고 환담하며 돈독한 정을 쌓았다. 물론 연장자인 내가 매번 밥을 샀다.
홍준표와 마찬가지로 손학규 역시 한국에 있을 때는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와 나는 뜻밖의 인연이 있었다. 내가 196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6ㆍ3 시위’를 주도했을 때, 그 역시 경기고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동참했다. 옛 운동권 동지였던 셈이다.
물론 그 이후의 인생행로는 아주 달랐다. 나는 졸업 후 재계에 투신해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학생운동·사회운동을 이어갔다.
손학규는 1년간 옥살이를 한 뒤 영국 유학을 떠나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서강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시절에도 진보적 소장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YS의 부름에 응해 보수 정당에 몸담았지만, 사실 진보 정당 쪽에 더 어울리는 이력인 셈이다.
그는 문민정부에서 최연소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는 등 정치인으로서도 빠르게 커나갔다. 내친김에 1998년 6월 경기도지사에 출마했지만,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에게 지면서 쾌속 질주에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었다. 그의 워싱턴행 역시 홍준표나 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패배에 따른 ‘단기 망명’이었던 셈이다.
그와 친해지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모로 상통하는 게 있었고 죽이 잘 맞았다. 학식이 풍부하고 청산유수인 그와는 대화도 잘 통했다. 공히 기독교 신자였던 우리는 매주 일요일 워싱턴의 한인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봤다.
그로부터 9년 뒤 그 손학규가 상대 정당의 대표가 돼 면전에서 나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광우병 파동 당시인 2008년 6월 10일 광화문 촛불 집회에 참가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및 지도부. 중앙포토
그때 불현듯 미국에서의 그 식사 자리들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해야 할 말도 함께 떠올랐다. 야당의 터무니없는 광우병 공세를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다만 그건 나와 손학규, 오직 둘이 있는 자리에서만 꺼낼 수 있었다.
회담 종료 후 나는 배석자들을 먼저 내보낸 뒤 그와 단둘이 마주 섰다. 그리고 그를 기습했다. 내가 입을 연 순간, 그는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