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259표. 6·3 지방선거에서 최대 승부처로 꼽힌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후보보다 앞선 규모다. 오 시장 당선에 따라 여권에서는 책임론 공방이 벌어지고,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까지 여파가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정 후보가 오 시장에게 패한 이번 선거에서는 두드러진 현상이 포착됐다. 서울시장에 나선 정 후보를 찍지 않으면서, 구청장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교차 투표’가 활발하게 이뤄진 것이다. 최대 8장인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민주당 지지자는 1번을, 국민의힘 지지자는 2번을 찍는 ‘줄투표’ 현상이 약해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과거와 다르다고 언급했던 이런 현상은 국민의힘 지지자보다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 유달리 강했다.
오 시장의 승리는 강남을 비롯한 ‘한강 벨트’ 등 집값 비싼 지역에서 쏟아진 몰표가 밑바탕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의 교차 투표가 없었다면 서울시장 자리는 정 후보에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 전체적으로 민주당 구청장 후보를 찍은 표는 268만1660표였는데, 정 후보를 찍은 표는 251만5560표였다. 민주당 구청장 후보는 찍으면서 정 후보를 찍지 않은 표가 16만6100표에 달했다. 이중 상당수가 줄투표를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여론조사 믿고 '부자 몸조심'
이런 교차 투표가 발생한 이유는 뭘까. 일각에서는 서울시장 자리에 구청장 출신 후보를 내세운 게 역부족이었다는 ‘인물론’을 거론한다. 정 후보가 폭행 의혹 등 네거티브 이슈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고, TV토론도 기피하는 등 앞서가는 여론조사만 믿고 ‘부자 몸조심’을 한 것도 패착이라는 분석이 있다. 정 후보 선거대책위에 속한 이들이 어차피 될 거라며 전리품에만 신경 썼다는 비판도 당내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하지만 이번 교차 투표 현상은 향후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그 특징과 시사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민주당 구청장 후보는 찍어주면서 정 후보를 찍지 않은 이탈표가 나온 지역이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이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서울에서 민주당 구청장 후보가 얻은 표가 정 후보 득표보다 가장 많은 자치구는 노원구였는데, 2만2541표에 달했다. 오 시장과 정 후보 득표 차의 37%가량이나 된다. 이어 중랑구, 관악구, 은평구, 성북구, 구로구 순이다. 서울 동북권과 서남부 등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지방선거 관련 현수막이 걸려 있다. 김성탁 기자
민주당 지지자들이 교차 투표에 나선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16일 중랑구 면목역 사거리를 찾았다. 이 일대에는 당선사례 현수막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류경기 중랑구청장 당선자를 비롯해 시의원, 구의원 당선자들이 ‘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문구를 내걸었다. 그 사이로 정 후보가 ‘부족했습니다.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지만, 사진도 담지 않은 채였다.
다세대 주택 등이 몰려 있는 면목동 일대에는 오세훈 시장이 ‘모아타운’ 등 재개발을 적극 추진하는 지역으로 선정한 곳이 많았다. 인근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진승근씨는 “부동산 문제 때문일 것”이라며 “이 근처에 집 가진 분들이 사무실에 와서 개발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오세훈 후보를 찍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중랑구에는 서울시나 국토부가 추진 중인 개발 사업이 많이 진행 중인데, 민주당 출신 시장이 나오면 아무래도 계획대로 추진하는 데 변화가 있을까 봐 우려한다는 설명이었다. 재건축·재개발 정책은 구청장이 아니라 서울시장의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 많다.
구청장은 민주당 찍고 정원오 안 찍은 교차 투표
노원·중랑·관악·구로구 등 민주 강세 지역서 뚜렷
"재개발 어그러질까봐" "정청래 민주당에 경고"
과거 민주당 출신 박원순 시장 시절에는 최고 층수를 35층으로 제한하는 규제가 있었다. 하지만 오 시장은 이를 완화해 한강변 아파트 재건축의 경우 68층을 허가하고, 강남 양재천 주변이나 목동 등에서도 49층 높이 재건축을 허용했다. 신속통합기획 정책을 도입해 재건축 진행 속도도 대폭 높였다.
중랑구뿐 아니라 노원구 등 서울 외곽은 1980년대 조성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의 재건축 연한이 한꺼번에 도래한 지역이다. 유권자들에겐 ‘이념’보다 ‘내 아파트의 빠른 재건축과 자산 가치 상승’이 주 관심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구청장 후보가 지역 관리를 잘해왔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도, 인·허가권과 도시계획 조례 개정 등의 절대적 권한을 가진 서울시장만큼은 규제 완화에 적극적인 오 시장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성북·중랑·은평·관악구 등 저층 주거지 밀집 지역도 재개발 계획 착수나 절차 단축에 대한 기대가 크다.
서울 외곽 주거지는 상대적으로 고령층 인구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다. 공시가격 현실화나 보유세 인상 등 세제 부담에 민감한 은퇴층 유권자들이 감세 기조에 손을 들어주었을 여지가 있다. 정 후보의 홈그라운드였던 성동구에서조차 민주당 구청장 후보의 득표가 정 후보 득표보다 많았는데, 한강변 재개발·재건축 이슈가 맞물린 지역이다.
"부동산 문제로 30대 여성도 돌아서"
이번에 나타난 교차 투표 양상은 민주당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장기보유특별공제 폐지 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속도감 있는 공급에는 방점을 찍지 않는 정책적 태도로는 '부동산 실용주의'를 원하는 유권자의 표심을 향후 선거에서도 잡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 시장 등 국민의힘 역시 이번 승리가 ‘조건부 지지’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주민과의 접점이 많은 구청장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17곳에서 당선됐고, 국민의힘은 8곳에 그쳤다.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 17곳, 민주당 8곳과 정확히 반대였던 만큼 민주당의 정책 변화에 따라 향후 선거에서는 다른 승부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정 후보를 찍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여권 내에서 불거진 ‘명청 갈등’ 양상이다. 면목 8동에서 만난 박모(60)씨는 “민주당 지지자인데 구청장은 민주당 후보를 뽑고 시장은 오세훈을 뽑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은 잘하고 있는데, 정청래 대표 등 민주당에 경고하고 싶었다”며 “공소취소 특검 같은 것도 선거 후에 하면 2년간 큰 선거가 없어 괜찮을 텐데 굳이 선거전에 해서 보수가 결집할 이유를 제공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이번 선거에서 동대문구에 출마해 당선된 한 시의원은 익명을 전제로 “오세훈 후보는 개발 비전 등 듣고 싶은 얘기를 하는데, 민주당 쪽에선 여론조사가 우위로 나오니 다 됐다고 생각하고 '부잣집 도련님'처럼 안전 문제나 얘기하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지역 대규모 아파트 단지만 봐도 30대 여성까지 부동산 정책 때문에 민주당에서 돌아서는 현상이 포착됐다”며 “폭행 의혹 등 네거티브 이슈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지 못하더라”고 한탄했다. 강북 지역에서조차 국민 평형 아파트가 15억원 이상 가는 시대에 도시 계획과 교통망 개선 등에 대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면 앞으로 서울 선거는 힘들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김민석·나경원 지역구 상대 당 강세
교차 투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서울시장 후보들의 득표율보다는 구청장 선거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얻는 득표가 선거 민심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표로 꼽을 만하다. 구청장 선거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얻은 득표수를 국회의원 지역구 별로 분석해보면 2년가량 남은 총선에 미칠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다.
2024년 총선 결과 서울 48개 지역구에서 민주당은 37석을, 국민의힘은 11석을 차지했었다. 국회의원 지역구에 속한 동별로 구청장 선거 득표율을 계산해 봤더니 민주당 우세 30곳, 국민의힘 우세 17곳, 초접전 1곳으로 나타났다. 의석수로 환산하면 민주당 의석은 7석 줄고, 국민의힘 의석이 6곳 늘어나는 현상이 관찰됐다.
김민석 국무총리의 지역구인 영등포을에서 민주당 구청장 후보는 국민의힘 구청장 후보보다 4338표를 적게 얻었다. 민주당 박성준 의원의 지역구인 중-성동을에서도 민주당 구청장 후보가 국민의힘 후보보다 4116표를 적게 받았다. 민주당 소속인 이정헌 의원의 지역구 광진갑, 고민정 의원의 지역구 광진을, 황희 의원의 지역구 양천갑, 남인순 의원의 지역구 송파병, 김동아 의원의 지역구 서대문갑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포착됐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의 지역구인 동대문갑의 경우 표 차이가 작았지만 국민의힘 구청장 후보가 앞섰다.
반대로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지역구인 동작을에서는 민주당 구청장 후보가 국민의힘 구청장 후보를 눌렀다. 지난 총선 때 국민의힘 김재섭 후보가 당선됐던 도봉갑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구청장 후보의 표차가 440에 불과할 정도로 초접전으로 분류됐다. 이번 지방선거가 시사하는 이런 흐름을 여야는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