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이초 교사 49재 추모일을 '공교육 멈춤의 날'로 정한 지난 2023년 9월 4일 오후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이 텅 비어 있다. 뉴스1
" 선생님 월급, 세금으로 받는 거 아닌가요? 그 세금 우리 엄마가 내는데. "
초등교사 A씨(37)는 말문이 막혔다. 열세 살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선생님이 들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존중도, 예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 선생님이란 어떤 존재일까’. A씨는 학생이 집에서 부모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지 떠올렸다.
" 아이가 방과 후 (교육) 활동이 많아서 헷갈려해요. 선생님이 시간표를 문서로 만들어서 애 가방에 좀 챙겨 주세요. "
한 학부모의 요구는 더 당황스러웠다. 방과 후 학교는 선택으로 이뤄지는 별도 프로그램이다. 외부 강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담임교사가 학생 개인별로 챙겨줘야 할 의무는 없다. 6학년 정도의 나이가 되면 스스로 일과표를 숙지하고 수업을 듣거나, 미흡한 건 부모가 챙겨줘야 할 부분이다.
A씨는 “어머님이 신청하신 거라 그건 어머님이 알려주셔야 한다”고 말했지만 “너무 복잡해서 모르겠으니 선생님이 챙겨 달라”는 답만 돌아왔다. 부모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응하지 않으면 ‘불성실한 교사’ ‘선생님이 책임을 방기했다’는 등 불만의 소리만 커질 게 뻔했다.
지난 10일 중앙일보 이팩트 취재진과 만난 14년 차 초등학교 교사 A씨가 현재 교실이 처한 씁쓸한 현실과 진짜 교육의 의미에 대해 담담히 얘기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지난 10일 ‘이것이 팩트다:이팩트’ 취재진을 만난 A씨는 “종종 직업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가 많다”고 했다. 20명 남짓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지만, 교실의 ‘고객님’을 위해 맞춤 서비스를 적재적소에 제공해야 하는 게 주된 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교사가 되었는가.’
악성 민원만 갑질이 아니다. 전담 케어를 요구하는 학부모 사례도 적잖다. A씨는 학부모의 각종 기행 사례를 엑셀 파일로 정리해 취재팀에 보여줬다. 그간 자신이 겪거나 동료 교사가 겪은 일들이다.
학부모 민원 사례
# 급식
“급식 적게 준다고 전화, 영양 선생님이 (이후 배식 때) 아이들 넉넉히 음식 챙겨주라는 취지로 말했는데, 덩치 큰 자신의 아이를 겨냥해 말했다며 엄마가 울고불고 난리. 영양 선생님이 아이에게 결국 사과.”
# 수업
“초품아 학교라 댁에서 운동장을 지켜보는 학부모 있음. 체육 수업 때 교사가 학생 어깨 잡고 줄 세우자 민원.” “공책 정리가 힘드니 우리 아이는 빼 주세요.”
# 방과 후
“끝나고 학원 버스 타야 되니 제때 학생에게 말해 달라.”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 5화에서 아들을 과잉 보호하며 교사에게 악성 민원을 일삼는 극성 학부모 역을 맡은 배우 박지연. 사진 넷플릭스
# 냉난방
“에어컨 너무 춥다.” / “에어컨이 약해서 아토피가 심해졌다.” #투약
“약을 먹여 달라.”, “안약 넣어 달라.”
# 현장 체험학습
“사진에 왜 없냐, 왜 인상 찌푸리고 있냐” 민원... 사진 안 찍고 안 올리게 됨 “버스에서 ***랑 앉혀 주세요.”
# 교우관계
“***가 (본인 자녀에게) 이런 잘못을 한 거 같으니 선생님이 사과를 받아주시고요.”
지난 10일 중앙일보 이팩트 취재진과 만난 초등학교 교사 A씨가 최근 동료 교사와 자신이 겪은 도가 지나친 민원 사례 일부를 파일로 간단히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김민정 기자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전 세계 27개국 1위를 기록하며 세간의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여전히 각종 SNS에는 “여기 나오는 일들이 실제로 있어? 초등학교 교사가 진짜 극단적 생각까지 할 정도로 학부모 민원이 많아?” 등과 같은 감상평이 올라온다.
실제 만난 일선 교사들은 현실이 더하다는 반응이다.
초등교사 노조가 최근 접수한 ‘악성 민원·부당 처우’ 사례를 보면 기가 막힌다. 학교 체육 대회의 꽃인 이어달리기(계주)가 있던 날, 한 팀이 결승선에서 근소한 차로 패배하자 학부모 항의가 빗발쳤다. “아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상대팀 승리로 판정했다. 선생님이 정정당당하게 살펴본 게 맞느냐”는 주장이었다. “달리기를 잘 못 하는 아이끼리만 조를 짜 달라”는 사적 요구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민원에 자주 노출되는 교사는 결국 모든 게임에서 승패가 없는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작은 사회에서 정당한 경쟁으로 이기고 지는 법을 배우는 기회조차 박탈하는 셈이다
지난 12일 서울 노량진의 초등교사노조 사무실에서 중앙일보 이팩트 취재진과 만난 강석조 위원장이 교육 현장의 어려움과 해법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취재팀은 지난 5월부터 6월 10일까지 접수된
1300여 건의 악성 민원, 부당 처우 사례를 초등교사 노조의 도움을 받아 처음 공개한다.
교실은 어쩌다 교육이 아닌 ‘고객님’을 모셔야 하는 공간이 됐을까?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런 기행적인 학부모 갑질은 단순히 일부 학부모의 돌발 행동에 지나지 않을까? 교실의 고객님들이 많아지고 있는 실태와 해법을 추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