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전세계가 경제 공황에 빠질 위험을 막기 위해 이란과 호르무즈해협을 개방하는 내용의 종전 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명예훈장 수여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어 자신의 명령으로 시작된 전쟁 때문에 유가 파동이 초래된 점은 언급하지 않은 채 “시장은 유가가 크게 하락하고 주가가 크게 상승하는 현 상황을 매우 좋아하고 있다”며 이번 MOU를 “(이란의) 무조건 항복”이라고 자평했다.
━
“폭격했어도 호르무즈 열리지 않을 것”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더 강하게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2~3주간 (이란에) 들어가서 그들을 미친 듯이 폭격하는 것이었다”며 “그렇게 해서 뭘 얻을 수 있나. 호르무즈해협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폭탄을 투하하는 한 그곳(호르무즈해협)은 자동으로 페쇄된다”며 “우리는 몇 달 동안 석유를 공급받지 못할 것이고, 세계적 경제 공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했다.
현지시간 18일 이란 ISNA 통신이 입수한 이 사진에는 호르무즈 해협을 따라 위치한 반다르압바스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이 AFP=연합뉴스
이란에 유리한 협상을 체결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주식시장이 방금 사상 최고 기록을 세우고 유가가 급락하는 상황에서 내가 이란에 대해 충분히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번 전쟁 기간 이란이 지렛대로 활용한 호르무즈해협 봉쇄의 위력을 일부 인정한 발언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럼에도 해협 개방을 위해 체결한 MOU에 대해 이란의 무조건적 항복이라고 주장했다.
━
해협 봉쇄 초래했으면서…개방에 감사하라?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앞서 소셜미디어(SNS)엔 “석유가 흐르고 있고 이란은 결코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세계는 안전할 것이다!)”며 “주식시장은 급등하고 있고 고용은 사상 최고 수준이며, 물가는 내려가고 있다(생활비 부담 완화!)”고 적었다. 이어 “천만에!(You‘re Welcome!)”라는 말을 달았다. ‘천만에’는 감사 인사에 대한 답례로 쓰이는 말로, 호르무즈를 개방해 유가를 내리게 한 자신에게 세계가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진행한 명예훈장 수여식에서 미 해병대 제임스 케이퍼스 주니어 예비역 소령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종전에 반대하며 레바논 내 친(親)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와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는 레바논, 헤즈볼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완전한 휴전을 기대한다”고 했다. 이란과 “레바논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군사작전의 즉각적이고 영구적 종료를 선언한다”고 합의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협상에 방해가 돼선 안 된다고 압박한 말이다.
다만 이스라엘은 19일에도 레바논 남부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해 최소 22명이 숨졌다. 레바논 국영 통신사 NNA는 이번 공습으로 민간인 최소 18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일간지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교전 과정에서 이스라엘군 병사 4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
‘60일 개방’ 합의한 이란…통행료 징수 준비?
트럼프 대통령이 성과로 내세운 호르무즈해협은 미국이 시작한 전쟁 전에는 자유로운 항해가 보장됐던 곳이다. 게다가 이번 합의에서 이란이 합의한 개방 기한은 협상이 진행되는 ‘60일’에 불과하다. 특히 MOU엔 “이란이 향후 관리 및 해양 서비스에 대해 오만 및 걸프국과 협의한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이란은 이를 “이란의 해협 통제권을 공식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1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명예훈장 수여식에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실제 이란은 이러한 합의를 근거로 이날 이란 페르시아만해협청(PGSA)을 통해 호르무즈해협 통항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이란은 해협에 설치된 기뢰의 위험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로를 통해 신속하게 운항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PGSA는 “해협 진입·진출 구역의 대기를 방지하기 위해 해협 관할 구역에 도착하기 최소 48시간 전 필요한 모든 정보를 기재해 이메일로 보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미 호르무즈해협 통행량은 MOU 체결 전에 비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운 데이터 분석업체 AXS 마린에 따르면 MOU 체결 이후 상업 선박 통행량은 18일 하루만 25척에 달하며, 이는 기존 일평균 수치의 5배 이상이다.
특히 이란 언론들은 이번 조치에 대해 “일단 이란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60일 동안은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60일 간의 무료 통항 기간 이후 통행료를 부과할 계획을 시사한 말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 안쪽에 갇힌 한국 선박 총 24척도 해협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 선사들이 개별적으로 PGSA에 신청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한국 선박이 신속하게 해협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이란 당국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선박이 통항에 나서면 정부는 실시간 교신으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예정이다.
━
‘북핵의 전철 되느냐’는 질문에 답변 피해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전쟁의 핵심 명분이 됐던 이란의 핵폐기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발언을 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향후 60일 안에 이란과 핵폐기와 관련한 협상을 마쳐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2018년 6월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싱가포르에서 가진 1차 북미정상회담 당시의 사진을 게시했다. 트럼프 대통령 SNS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뉴욕타임스(NYT)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란이 북한의 방식대로 핵무기를 몰래 개발할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확답을 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이제 북한식 모델을 따를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김정은)는 심각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그런 일이 허용돼서는 안 됐다”고만 답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수중에 넣은 시점이 클린턴 행정부 때인지 오바마 행정부 때인지 되물었다. 민주당 정부 때 북한의 핵무기 획득이 이뤄졌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중단과 농축우라늄의 미국 반출을 사실상의 ‘레드라인’으로 내세워왔다. 그러나 이란과 합의한 MOU엔 농축 우라늄을 이란 내에서 희석하기로 하며 물러섰고, 반출에 대한 합의는 MOU에 담지 못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일 최성남 군수공업부 부부장과 함께 새로 가동한 핵물질 생산공장에서 원심분리기 사이로 생산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김 위원장 뒤로 강경호 핵무기연구소 부소장이 수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이란의 비군사적 목적의 우라늄 농축은 물론 이란의 탄도미사일과 드론까지 일부 허용할 방침을 밝혔다. 이란 내 강경파들은 미국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기술을 확보한 북한은 미국의 공격을 받지 않는 상황을 일종의 롤모델로 보고 있다.
━
‘킥오프’ 협상 연기…트럼프 “내 권력 한계 없다”
이런 가운데 백악관은 이날 이란과의 후속 실무 협의를 위해 예정했던 JD 밴스 부통령의 스위스 방문이 연기됐다고 밝혔다. 밴스 부통령은 당초 19일로 예정됐던 MOU 서명식에 이어 협상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7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만찬 도중 돌연 MOU에 서명하면서 서명식이 무의미해졌고, 실무협상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일각에서는 종전 합의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공습을 이어가고 있는 점이 스위스 회담 무산의 배경이라는 분석(악시오스)도 나온다. 실제 CNN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이란 측이 체결된 합의안에 명시된 대로 레바논 내 적대 행위가 종식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으로 협상이 일시적으로 연기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이 레바논을 포함한 포괄적인 휴전 이행 없이는 미국과 대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헤즈볼라 측에 전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헤즈볼라 소속 하산 파들랄라 의원은 로이터통신에 “이란이 포괄적 휴전 이행 없이는 미국과의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통보해 왔다”고 전했다.
밴스 부통령은 이란과 합의한 협상이 이날 시작됐다고 확인했다. 8월 16일까지 60일 이내에 끝내야 하는 핵협상 시한 중 하루가 이미 지나갔다는 의미다.
현지시간 18일 마수드 페제스키안 이란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서명한 각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담긴 화면 캡처. 로이터=연합뉴스
MOU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총력 대응하며 성과를 홍보한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직접 서명한 MOU 원본을 들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는 역사적 문서이자 강력한 이란이 보내는 메시지”라며 “오늘 기록에 남겨진 성과는 국가적 인내, 정치적 합리성, 책임 있는 외교가 결합한 결과물”이라고 강조했다.
승리를 자평한 ‘인증샷’이 공개되자 백악관은 뒤늦게 트럼프 대통령의 MOU 서명 영상을 올리며 “미국이 이란에 3000억 달러를 지급한다는 것은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백악관이 가짜뉴스라고 한 ‘3000억 달러의 재건기금’은 MOU에 명시돼 있다. 전쟁을 벌인 미국이 아닌 한국 등 동맹국 기업들의 투자금 명목으로 해당 기금을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이를 패전을 인정하는 ‘전쟁배상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악관은 18일(현지시간) 이란 대통령이 양해각서 서명 원본을 들고 있는 사진을 올리자 뒤늦게 지난 17일 프랑스 베스사유 궁전에서 진행된 만찬 도중 MOU에 서명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영상을 올렸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백기투항을 자신하고도 논란을 빚고 있는 종전 합의에 이르게 된 상황과 관련 ‘권력의 한계에 대해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그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대통령 권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내게) 한계는 없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