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여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특사 조지 매카트니가 청(淸)나라 황제의 여름 휴양지 청더(承德)에서 건륭제를 만난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상자에 조지 3세의 친서를 담아 들고 갔다. ‘광저우(廣州)항 말고 다른 항구도 열어달라.’ 영국은 무역을 하고 싶었다.
건륭제의 답은 이랬다. “천조는 물산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다(天朝物產豊盛, 無所不有).” 우리는 자급자족하는 나라이니, 변방과 교역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건륭황제의 ‘자급자족’ 인식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중국은 지금 특유의 ‘홍색 공급망(Red Supply Chain)’을 짜는 중이다. 한 제품의 생산 과정 전체를 중국 안에서 모두 끝내려 한다(수직 공급망 통합). 리튬을 추출해 배터리를 만들고, 이를 차체와 조립해 전기차를 완성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완구·가전·자동차·조선, 심지어 반도체까지 모두 만든다(수평 공급망 확충). 세계 우산의 3분의 1이 쩌장(浙江)성 송샤(崧厦)라는 도시 한 곳에서 생산된다. 중국은 작년 세계 선박 발주 물량의 60% 이상을 쓸어 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내수 시장은 쏟아지는 제품을 다 받아내지 못한다. 공급 과잉은 ‘덤핑 수출’로 이어지고, 글로벌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서방 각국이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공급망’에 관심을 두는 이유다. 지난주 G7(서방 선진 7개국) 정상회의에서 희토류 공동 비축 문제가 논의된 건 이를 보여준다.
건륭제의 ‘자족 선언’은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후 중국은 ‘100년의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영국의 기술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런 중국이 지금 자족 공급망 구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역시 기술이 핵심이다. 서방과 맞붙어도 되겠다는 기술 자신감이 있기에, 그들은 홍색 공급망 구축에 더 집착한다. 그렇게 글로벌 공급망은 분절(分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