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한국은행 별관 컨퍼런스홀에서 2026 상반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이 진행되고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모두발언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반도체 호황이 한국 경제를 보는 기준까지 바꾸고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한은 창립기념사, 19일 한국금융학회 기조연설 등에서 잇따라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강조했다. 신 총재는 19일 “앞으로는 실질 GDP뿐 아니라 명목 GDP도 계속 봐야 한다”고 말했다.
명목 GDP는 그해 가격으로 따진 경제 규모다. 가격 변동을 걷어내 생산량 변화를 보여주는 실질 GDP와는 차이가 있다. 통상 경제 상황은 물가 변동을 제거한 실질 GDP 성장률로 판단한다. 신 총재의 명목 GDP 강조가 이례적인 이유다. 올해 1분기 명목 GDP는 전년 동기 대비 17.1%(전기 대비 10.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실질 GDP 성장률은 3.8%(전기 대비 1.8%)였다. 실질 지표만으로는 최근 소득·구매력이 나아졌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게 신 총재의 문제의식이다.
배경에는 반도체 가격 상승에 따른 교역조건 개선이 있다. 신 총재는 “내수 디플레이터가 2.1%지만 수출 디플레이터는 23.5%에 달한다”면서 “높은 명목 성장률은 국내 인플레이션에 기인한 게 아니고 수출물가가 많이 급속도로 자랐기(올랐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수출가격이 오르며 만든 성장이라는 의미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가 실질 GDP와 실질 국내총소득(GDI)의 격차다. 1분기 실질 GDP는 3.8%, 실질 GDI는 13.2% 성장했다. 신 총재는 “실질 구매력을 보여주는 국내총소득(GDI)과 국민총소득(GNI)도 두 자릿수에 가까운 증가율을 나타냈다”고 했다. 반도체 가격이 수입품 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면서 같은 양을 팔아도 국민경제의 구매력이 향상됐다는 의미다.
명목 gdp
정부도 같은 숫자를 주목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일 1분기 명목 GDP 성장률에 대해 “재정 건전성이 한층 더 튼튼해질 뿐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 여력도 커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20일 “올해 한국 경제의 명목 GDP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면서 “기업 이익과 세수, 경상수지 흑자가 동시에 늘고 있는 역대급 호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역대급 호황은 그에 걸맞은 상상력을 요구한다”며 호황의 과실을 미래 산업과 취약계층 지원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했다.
관건은 반도체가 만든 성장이 한국 경제의 ‘진짜 체력’인지다. 신 총재는 금융학회 연설에서 “한 번 이렇게 잠시 지나가는 일인가, 아니면 조금 더 지속적으로 있을 현상이냐”를 물어야 한다며 “그 답에 따라 앞으로 실물경제가 어떻게 진행될까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반도체 수요가 장기화하면 저성장·저금리 공식이 흔들릴 수 있지만, 가격 효과가 꺾이면 숫자는 빠르게 되돌아갈 수 있다.
다만 명목 GDP를 근거로 경제와 재정 상황을 낙관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양준석 가톨릭대 교수는 “명목 GDP 성장률은 실질 GDP 성장률에 물가 상승률이 더해진 개념인 만큼, 경제가 실제로 좋아졌는지를 판단하려면 다른 지표와 함께 봐야 한다”며 “반도체 가격 상승에 따른 국민소득 증가는 단기적 현상일 가능성도 있어, 반도체 수요에 대한 확실성을 얻지 못하면 일단 임시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