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10주년을 앞둔 영국이 또다시 총리 교체 국면에 들어갔다. 키어 스타머(64) 총리가 22일(현지시간) 전격 사임을 발표하면서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7번째 총리를 맞게 됐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22일(현지시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대국민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스타머는 이날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노동당 대표직과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는 “당이 지금 묻는 말은 내가 다음 총선을 이끌 최선의 인물인가 하는 것”이라며 “의회 노동당 의원들의 답을 분명히 들었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노동당은 오는 7월 9일부터 차기 지도자 선출 절차에 착수한다. 스타머는 “9월 의회 복귀 전까지 새 노동당 대표와 총리가 선출될 것”이라며 후임이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스타머는 연설 말미 가족을 언급하며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라에서 가장 큰 직책을 떠나면 가장 중요한 직책인 남편과 아버지 역할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겠다”며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내 곁을 지켜준 아내 빅과 나의 자랑이자 기쁨인 아이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연설을 마친 뒤에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내와 함께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머의 최측근인 스티브 리드 지역사회부 장관은 사임 발표 직후 X(옛 트위터)를 통해 “스타머는 벼랑 끝에 몰렸던 노동당을 다시 살려냈다”며 “당을 정권 교체로 이끈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22일(현지시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사임 시기를 발표한 후 부인 빅토리아와 포옹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BBC와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스타머는 지난 주말 동안 총리 별장 체커스에서 장관들과 잇따라 통화하며 총리직 수행 가능성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측근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도 그가 끝까지 버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주말 동안 이어진 당내 인사들과의 대화 끝에 결국 정치적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스타머는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압승으로 이끌며 14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후 경기 둔화와 복지 개혁 논란, 재정 압박, 이민 문제, 당내 반발이 겹치며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약화됐다. 이날 기준 유고브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4년 8월 36%이던 스타머총리 지지율은 현재 18%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최근 수십 년간 영국 총리 지지율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노동당 지지율도 총선 이후 약 14%포인트 떨어졌다. 급기야 노동당 내부에서는 최소 4명의 장관이 공개적으로 퇴진 일정을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등 압박 수위가 높아졌다.
영국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위기의 배경으로 브렉시트 이후 누적된 정치·경제적 불만을 꼽는다. 코로나19와 에너지 위기, 고물가가 겹치며 경제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브렉시트의 핵심 명분이었던 이민 통제도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다. 영국 순이민자는 2015년 33만3000명에서 2023년 94만4000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바 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영국 위건에서 노동당의 앤디 버넘이 메이커필드 보궐선거 승리 후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번 스타머의 사임으로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이어진 정치적 불안정을 다시 드러내게 됐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를 시작으로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 키어 스타머에 이어 또 다른 총리가 등장하게 된다. 특히 최근 4년 사이 총선 패배가 아닌 집권당 내부 반발로 총리가 퇴진하는 사례가 세 번째가 된다.
차기 총리 후보로는 지난주 메이커필드 보궐선거에서 54.8% 득표율로 압승하며 하원에 복귀한 앤디 버넘(56) 전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버넘은 이날 X를 통해 “나는 그 과정의 일부로 나 자신을 내세우겠다”며 사실상 총리 도전 의사를 공식화했다. 버넘의 승리는 노동당 내 불만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라는 별명을 가진 버넘은 맨체스터 시장 재임 시절 지역경제 활성화와 대중교통 개혁 등을 추진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지방분권 확대와 정치 개혁을 주장해온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다만 누가 후임이 되더라도 영국이 직면한 저성장과 국가부채, 공공서비스 위기, 이민 문제, 국방비 확대 부담, 브렉시트 이후 EU와의 관계 재정립 등 구조적 과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영국 정치 위기는 브렉시트나 특정 총리의 실패가 아니라 수십 년간 누적된 정치·경제적 불만의 결과”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