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보통주)를 제치고 국내 증시 시가총액 1위에 오른 SK하이닉스가 미국행 채비에 나섰다.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인공지능(AI) 반도체 투자에 쏟아붓고 미국 AI 생태계와 연결고리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23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ADR 상장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ADR은 미국 투자자가 해외 기업 주식을 미국 증시에서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증권이다. 상장 시점은 이르면 오는 7~8월이 될 전망이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 ADR을 발행해 미국 시장에 상장하면 글로벌 기관투자자와 상장지수펀드(ETF) 자금 유입이 유리하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ADR 발행에 따라 (경쟁사인) 마이크론을 보유한 펀드의 즉각적인 (SK하이닉스) 편입이 발생이 예상되며 주가는 가파른 재평가가 발생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기도 용인시 에 조성 중인 SK하이닉스 반도체 일반 산업단지. 우상조 기자
반도체 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ADR 상장을 통해 140억~200억 달러(약 21조~30조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장기적으로 순 현금 100조원 이상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 1분기 기준 삼성전자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147조원 수준이지만, SK하이닉스는 54조원에 불과하다. 이번 ADR 상장을 통해 확보한 대규모 달러를 바탕으로 투자 여력을 키우고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좁히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확보한 자금은 신규 패키징 라인 증설과 클린룸 확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추가 도입 등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능력 확대에 쓰일 전망이다. SK하이닉스의 설비투자는 2023년 6조5910억원에서 지난해 30조1730억원으로 늘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2일 ‘컴퓨텍스 2026’에서 “2030년까지 메모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강남구 깐부치킨 삼성점에서 '치맥 회동'을 하고 있다. 뉴스1
ADR 상장은 최근 SK하이닉스가 추진 중인 미국 AI 생태계 편입 전략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차세대 AI 메모리 공동 개발에 나선 데 이어 미국 인디애나주에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올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AI 솔루션 전문 법인 설립 계획도 발표했다. 생산과 연구·개발(R&D)에 이어 자본시장까지 연결해 미국 AI 생태계 핵심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행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업계에선 SK하이닉스의 ADR 상장을 1990년대 미국 자본시장에 진출한 반도체 기업 ASML과 TSMC와 비교한다. 네덜란드 ASML은 1995년 나스닥에, 대만 TSMC는 1997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각각 상장하며 글로벌 투자자 기반을 넓혔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이들 업체는 미국 자본 시장을 통해 안정적인 달러 자금 조달 창구를 확보하고 글로벌 기관투자가의 투자 대상에 편입됐다”고 분석했다. 이후 ASML은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개발에 대규모 연구·개발(R&D) 자금을 투입했고 TSMC는 초대형 반도체 제조시설인 기가팹 건설 등 생산능력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AI 반도체 시장의 최종 수요처는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오픈AI 등 미국 빅테크”라며 “ADR 상장은 자금 조달 수단을 넘어 기정학적 측면에서 미국 AI 공급망에 더욱 깊숙이 편입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