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뾰족한 산 사이로 굵은 물줄기가 내려온다. 폭포수 옆에 흰 옷 입은 여자와 남자가 서 있다. 미국 시카고미술관이 23~24일(현지시간) 여는 한국 미술 심포지엄 포스터다. 이건희컬렉션 해외 순회전 연계 심포지엄 포스터에 채택한 그림은 백남순의 ‘낙원’(1936)이다.
백남순(1904~94)은 파리 유학 중 임용련(1901~50)을 만나 결혼한다. 임용련은 시카고예술대를 거쳐 예일대 미대를 수석 졸업하면서 유럽미술연구 장학생으로 파리에 간 참이었다. 귀국해 부부 화가전도 열었지만, 식민지 경성에 이들의 꿈을 펼칠 곳은 없었다. 임용련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영어·미술 교사로 취업했다. 백남순은 거기서 함께 미술반을 이끈다. 그때 제자가 이중섭이다.
1930년대 '낙원' 병풍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임용련, 둘째 선영, 셋째 선명을 안고 있는 백남순, 첫째 선애. [사진 유족 제공]
전쟁통에 이들의 그림은 포격으로 모조리 유실된다. 미 군정기 서울세관장을 지낸 임용련은 6·25 때 남침해 온 공산군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백남순은 일곱 자녀를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 갔다. 거기서 서울대 미대 강사로 지내다가 전후 성심공민학교를 세웠다. 의무교육 확대로 1962년 폐교될 때까지 전쟁고아와 빈민 교육에 헌신했다. 이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뒤따라가 다시 붓을 들었다.
백남순의 ‘낙원’을 넣은 시카고미술관의 한국 미술 심포지엄 포스터. [사진 한국국제교류재단]
국내 화단에서 완전히 잊힌 그의 존재는 1981년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의 인터뷰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를 본 친구 민영순이 “백남순이 결혼 선물로 그려 선물한 그림이 있다”고 제보해 왔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8폭 병풍화 ‘낙원’(1936)은 그렇게 발견돼 이건희컬렉션에 들어갔다.
이런 사연을 엮어 책 『아주 사적인 미술관』을 출간하면서 저작권자인 백남순의 유족을 수소문했다. 미국에서 의과학자로 일한다는 증손녀 켄달 박이 보내온 이메일을 열던 순간은 잊을 수 없다. 작품 이미지 사용을 허락한다는 내용과 함께 시카고예술대 졸업 앨범 등 그가 조사하던 미국의 증조할아버지, 임용련의 기록도 공유했다. 백남순과 임용련, 두 사람은 이제 ‘낙원’에 도달했을까.
묻힐 뻔한 그림을 세상에 나오게 한 1980년대의 기사, 그리고 그 유족과 소통하며 쓴 2024년의 책은, 쉬이 찢어지는 종이신문과 책이 실은 질긴 시간을 버텨왔음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사례다. 그래서 여전히 읽고 쓴다. 기사도, 책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