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북중미 월드컵에서 무승부가 속출하고 있다. 무승부의 표정은 다양하다. 네덜란드 대 일본 전은 2대2였는데 일본은 마치 승자처럼 환호했고 네덜란드는 패자처럼 침통했다. 한국 대 멕시코 전을 앞두고 내심 무승부를 바랐으나 실패했다. 멕시코는 친근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BTS 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잡고 32강전에 가면 좋겠다 싶었는데 승부 세계는 역시 비정한 것. 축구든 바둑이든 그런 마음으로는 승리를 거머쥘 수 없나 보다. 오늘은 바둑에서의 무승부 한판을 소개하고 싶다. 그 무승부가 만들어낸 역사적 명승부를 추억하며 오늘 열리는 한국 대 남아공 전의 승리를 기원하고 싶다.
반집 덤에도 무승부 안 없어져
이세돌 무승부 끝 삼성화재 우승
한국, 32강 넘어 결승에 진출하길
김지윤 기자
14년 전인 2012년 9월. 중국 베이징. 삼성화재배세계바둑 32강전 조별리그에서 한국의 이세돌 9단과 중국의 구리 9단이 맞붙었다. 28번 싸워 14승 14패. 그야말로 숙적인 두 사람의 29번째 대결이 시작됐다. 바둑은 처음부터 격렬했다. 초반 약간의 실패를 감지한 이세돌이 벼랑 끝 전술을 펼치며 바둑을 전면전으로 몰고 갔다. 흑백의 돌들이 용처럼 서로 감겨 사투를 벌였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살(殺)의 바둑이 펼쳐졌다. ‘수상전이다!’라는 비명이 나지막하게 터져 나왔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극한의 수읽기 속에서 ‘4개의 패’가 마치 전설 속의 문양처럼 나타났다. 서로 얽힌 두 개의 대마가 패를 번갈아 따냈다. 동형반복이다. 죽지 않으려면 영영 멈출 수 없다. 어느 순간 두 기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봤고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승부. 세계바둑대회 본선에서 처음 무승부가 등장했다. 대회 주최 측은 고심에 빠졌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해 준비가 없었다. 축구의 승점제 같은 것도 없었다.
바둑에서는 대국이 끝난 후 흑과 백의 집이 똑같으면 무승부가 된다. 옛사람들은 이를 화국(和局)이라 부르며 좋은 일로 여겼다. 1940년 일본에서 프로바둑대회가 처음 생기면서 백의 불리를 상쇄하는 ‘덤’이란 게 생겨났고 그 덤에 반집을 얹어 무승부를 막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반집 덕분에 바둑에서 무승부가 사라졌을까.
아니다. 사라지지 않았다. 바둑판엔 같은 형태가 영원히 반복되는 두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3패’와 ‘장생(長生)’이다. 이 경우 승부를 낼 수 없어 무승부가 된다.
대형 수상전에서 패가 동시에 3개 만들어지면 쌍방 돌아가며 패를 따내게 된다.(4패는 3패와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이 죽음을 받아들여 딴 데를 두지 않는 한 영원 반복이 된다.
장생은 현현기경에 죽음의 궁도인 오궁도화(五宮挑花)를 사이에 두고 동형반복하는 두 개의 그림이 있을 뿐 실전에서 구경할 수는 없었다. 2013년 KB바둑리그 최철한 9단 대 안성준 4단의 대결에서 장생이 나타났다. 이게 한국 최초이자 마지막 장생이었다.
다시 이세돌 대 구리의 대결로 돌아가면 대회 주최 측은 고심 끝에 재대결을 결정했다. 온종일의 사투로 진이 다 빠졌으나 다음날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후 늦게 재대결이 시작됐고 여기서 이세돌이 졌다.
한데 당시 32강전은 월드컵 축구와 비슷하게 한 조에 두 사람이 올라가는 시스템. 이세돌은 간신히 살아남았고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매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결승에서 다시 격돌했다. 결승3번기의 첫판은 이세돌 반집승. 본인 표현대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바둑을 기적적으로 역전시켰다. 2국은 대마가 죽어 만방으로 졌다. 세 번째 판은 끝없는 추격 끝에 초미세 승부로 얽혀들었는데 계가를 해보니 다시 반집승. 반집+반집. 합계 ‘1집’을 이겨 이세돌은 챔피언이 됐다. 승부사라는 직업은 극한직업이다. 마른 체구의 이세돌은 집중하기 위해 아침도 굶고 커피만 마시면서 혼신을 다해 눈물겨운 승리를 만들어냈다. 몸에 남아있는 마지막 1g까지도 갈아 넣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이처럼 자기 몸을 갈아내는 독기가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오늘 한국 축구팀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한국팀이 승리하여 32강전에 오르기를 기원한다. 이후에도 계속 이기고 또 이겨 결승전에서 한국과 멕시코가 다시 맞붙는 꿈을 꾸어본다. 마치 14년 전 이세돌 바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