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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1986년 노르웨이, 2026년 대한민국

중앙일보

2026.06.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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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실장

예영준 논설실장

건강하게 살고 있는 그 나라 국민에겐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네덜란드병’은 경제학 교재에 버젓이 등장하는 용어다. 1959년 북해에서 발견된 가스전으로 일약 돈방석에 올라앉게 됐지만, 결국 그게 화근이 되어 네덜란드의 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오랜 침체의 수렁에 빠진 현상을 말한다. 막대한 외화 수입은 자국 통화가치 상승을 불렀고 자동차, 선박, 기계 등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졌다. 정부는 정부대로 선심성 복지를 늘렸고, 이는 시중에 넘치는 돈과 결합돼 인플레와 임금 상승의 악순환, 급기야는 대량 실업과 마이너스 성장으로 추락했다. 네덜란드병을 벗어나기까지 대략 20년이 걸렸다.

“석유 판 돈 풀면 월급은 휴지조각”
노르웨이, 노동계 압박속 미래 대비
한국은 반도체 호황 과실 나눠먹기
‘AI발 네덜란드병’ 닥칠 수 있다

돈벼락을 맞았다고 모두 같은 병에 걸리진 않는다. 네덜란드보다 10년 뒤 이번엔 노르웨이 쪽 북해 대륙붕에서 원유 잭팟이 터졌다. 북유럽에서 가장 가난하던 나라에 돈벼락이 쏟아졌으니 복지 증액과 임금 상승 압박 등 돈풀기 요구가 넘쳐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르웨이 경제가 타격을 받았던 1986년의 대규모 노사분쟁은 그 절정이었다. 노동당 정부를 이끌던 여성 총리인 그로 할렘 브룬틀란은 “석유 판 돈을 왜 정부가 쥐고만 있냐”는 압박에 이렇게 답했다. “석유 판 돈을 풀면 물가가 폭등해 당신 월급은 휴지 조각이 되고 우리는 네덜란드병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노동자 10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직장폐쇄와 이에 맞선 유전 노동자들의 파업을 강제 중재로 해결했다. 이어 1988년에는 임금 인상 상한선을 두는 법을 통과시켰다. 대신 고용안정과 점진적으로 복지를 약속했다. 최종 종착점은 석유 수익을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남겨 두는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출범(1990년)이었다. 석유 판 돈으로 해외 자산에 투자하고 수익을 정부 예산에 투입할 수 있는 한도(현재 3%)를 설정해 과도한 현금 자산의 국내 유입을 차단했다. 지금 노르웨이는 1인당 GDP 8만 달러 돌파를 바라본다.

목하 대한민국도 반도체 수퍼사이클 덕분에 단군 이래 최대의 돈벼락을 맞는 중이다. 삼성전자의 1분기 영업이익이 57조원을 넘어섰는데, 일본 토요타가 분기가 아닌 연간으로 달성한 최고 기록이 5조 엔대, 줄잡아 50조원이다. 그래서 부쩍 등장하는 용어가 초과이윤이다. 무한 이윤 추구가 생존의 이유인 기업에 초과이익이란 말은 형용모순일 수 있지만,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이윤을 거두고 있는 게 현실이다. 40여 년 전 미래 먹거리로 사업을 일으킨 1세대 기업인의 혜안과 연구원·엔지니어의 땀이 있었기에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수퍼사이클의 결실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금 이 횡재를 두고 우리 사회가 보이는 모습은 준비된 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거액의 성과급을 손에 쥐게 된 종업원들과 성과급 때문에 나의 파이가 쪼그라들었다고 여기는 투자자들 사이의 욕망의 충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해 그저 아픈 배를 쓰다듬을 수밖에 없는 대다수 서민의 박탈감, 정부의 권능으로 파이의 배분을 저울질하는 모습까지 모두가 단군 이래 우리가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이다.

미증유의 연속 속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수퍼사이클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 그것도 주기가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당장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반도체발 네덜란드병의 전조들이다. 수출은 역대 최고인데 내려야 할 환율이 계속 오르고 물가와 금리까지 뛰는 3고, 성과급이든 주식 차익이든 결국 부동산으로 향하는 머니 무브, 코스피지수 9000포인트를 오르내려도 오른 종목 100에 내린 종목이 800개인 자본시장 양극화, 이런 요인들이 모두 합쳐져 나타나는 비(非)반도체 분야의 경쟁력 하락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살로 볼 일이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반도체 대박이 터진 대만의 사례가 있다. 지난해 8.7%의 고성장을 기록했지만 소비는 1.3% 늘어나는 데 그친 내수부진, 성장의 과실이 한쪽으로만 몰리는 양극화와 물가, 부동산 앙등이 우리와 닮은꼴이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대만이 네덜란드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리며 ‘포모사 독감’이라 명명했다. 포모사는 대만의 별칭이다.

넘쳐나는 돈을 마냥 쌓아둘 수만은 없는 일이니, 어딘가에는 써야 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기업은 다음 먹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차세대 게임체인저 경쟁에서 뒤처지면 하루아침에 메모리 왕좌의 지위를 넘겨줄 수도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넘치는 세수를 놓고 역대 민주당 정부의 확장 재정 관성이 작동하면 안 된다. 기본소득, 국민배당금, 사회연대임금 등의 발상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반도체 초과세수는 지금 당장 어떻게 나눠줄지가 아니라 어떻게 미래 세대를 위한 종잣돈으로 쓸지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 골든타임을 잘못 보내면 언젠가 경제학 교과서에 한국병이 등재될지 모른다. K반도체가 부른 호황이 K자 양극화를 낳고 K디지즈(한국병)로 귀결되게 할 수는 없다.





예영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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