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이상하게 그 번호를 받고 싶더라고요. 육군본부에서 ‘아버님이 전사 처리가 되셨다’고 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이게 기쁨의 눈물인지, 뭔지…. 전화를 끊고도 그렇게 몇 시간을 울었어요.”
24일 수화기 너머 고(故) 이강종 이병의 아들 선재(78)씨의 목소리는 벅찬 기쁨에 떨리고 있었다. 77년 전 아버지가 이북의 차가운 땅 위에서 눈을 감을 때 아들은 돌도 넘지 않은 아기였다.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자란 돌쟁이가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진실은 그 세월 만큼 아득한 역사의 먼지에 가려져 있었다.
지난해 경기도 양평 단월면 이선재씨가 자택에서 국방부 전사망민원조사단 조사를 마치고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창군 이래 최대 월북 사건으로 꼽히는 1949년 ‘강태무·표무원 월북 사건’. 부대장에 기만당해 북녘 땅으로 넘어간 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탈영 처리됐던 부대원 이강종 이병에 대해 군 당국이 ‘전사’ 결정을 내렸다. 강태무 사건과 관련해 국가 차원의 판단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사건으로 300명 넘는 장병들이 실종됐는데, 현대사의 그늘에 가려 잊혀졌던 이들에 대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긴 셈이다. 〈
중앙일보 2025년 6월 25일자 1·6면〉
이날 군 당국에 따르면 육군본부 보통전공사상 심사위원회는 지난 17일 이강종 이병에 대해 군인사법 54조에 따른 전사 결정을 내렸다. 이는 그가 ‘적과의 교전 또는 적의 행위로 인해 사망’했다는 걸 군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번 결과는 지난해 6월 아들 이씨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 달라”며 국방부 조사본부 전사망민원조사단(민조단)에 민원을 제기한 뒤 만 1년 만에 나온 것이다. 민조단은 이강종 이병과 같은 부대 소속으로 함께 북 측으로 넘어갔다 귀환한 고(故) 허모 씨의 생존 당시 증언과 병적기록부, 제적등본 등을 토대로 그가 월북 직후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사망 또는 행방불명 됐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육군이 전사 판정을 한 것이다.
육군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장병들의 희생이 잊히지 않고 그들의 명예가 정당하게 평가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경기도 양평 단월면 이선재씨가 자택에서 국방부 전사망민원조사단 고병현 조사관과 함께 아버지의 행적에 관한 병적기록부를 보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이로써 이강종 이병과 유가족은 77년 만에 명예를 되찾게 됐다. 그전까지는 이강종 이병이 부대를 무단 이탈해 병적부에서 삭제됐다는 ‘탈삭’ 기록이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아들 이씨는 중앙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30년 넘게 애를 써왔는데 이제야 자식된 도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아버지께 저세상에서 이제 편히 잘 계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고 울먹였다. 이씨는 긴 세월 “아버지는 탈영병이 아니다”며 명예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청와대·국회 등 민원을 안 넣어본 곳이 없었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다가 이제야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강종 이병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강태무·표무원 사건으로 실종된 장병 대다수는 여전히 탈삭 처리된 상태다.
강태무 사건은 1949년 5월 5일 강원 춘천지구에 주둔하던 육군 8연대의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예하 5·6·8중대를 이끌고 기획 월북한 사건이다. 육군발전사에 따르면 강 소령은 “38선 이북 고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으나, 북한군을 만나자 백기 투항했다. 고지 탈환 작전은 기만이었고, 강태무 외 장병들은 그에게 속아 정상 작전으로 알고 38선을 넘은 것이다. 강태무에 하루 앞선 5월 4일에는 8연대 1대대장이었던 표무원 소령이 부대원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2005년 김정일로부터 팔순 생일상을 받은 월북자 강태무씨. 조선중앙TV·연합뉴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신문 기사를 토대로 봤을 때 강태무·표무원 사건에 휘말린 장병은 700~800명에 이르고, 이 중 300여명 정도만 귀환했다. 300~400명은 전사 또는 월북, 실종됐다는 뜻이다. 대대적 환영을 받으며 월북한 강태무는 북한에서 승승장구했고, 200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팔순 생일상을 받는 등 천수를 누렸다.
남북 간 체제 경쟁이 극심하던 시기 우리 군이 자진 월북한 사건은 오명처럼 여겨졌고, 당시에도 군 당국은 이를 쉬쉬했다. 하지만 육군발전사와 당시 생존 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38선을 넘은 장병들의 상당수는 강태무의 명령에 불복, 투항하지 않고 미리 매복해 있던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입대 4개월만에 강태무 사건에 휘말렸던 이강종 이병도 이 과정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군이 이번에 전사 판정을 내려 이를 공인함으로써 이강종 이병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봉안하는 게 가능해졌다.
아직 규명해야 할 진실이 많지만, 강태무·표무원 사건 자체가 군에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은 한계로 꼽힌다. 이강종 이병은 북한군과 교전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동료 부대원의 증언 등 구체적인 정황이 뒷받침됐기에 전사 인정이 가능했다고 한다. 다수 실종자는 이런 정황조차 확보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