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트럼프평화연구소에서 열린 ‘팍스 실리카 정상회의 2026’에서 각국 대표들이 서명한 선언문을 펴 보이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인공지능(AI) 공급망 협력체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유럽 주요 국가와 중앙아시아, 중남미 국가들의 합류를 계기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AI를 둘러싸고 심화하는 글로벌 경쟁 속에 반도체와 핵심광물 등 공급망을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25일(현지시간) 오전 워싱턴 DC의 트럼프평화연구소에서 ‘팍스 실리카 정상회의 2026’ 개막식과 함께 중앙아시아 국가 카자흐스탄의 신규 가입 서명식이 열려다. 팍스 실리카 실무를 총괄하는 제이컵 헬버그 미 국무부 경제성장·에너지·환경 담당 차관은 개막식 기조연설을 통해 “AI는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닌 국가안보와 경제 주권의 핵심”이라며 “규제 우회 및 기술 유출 유려가 있는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을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AI 공급망 패권을 견제하는 발언으로 풀이됐다.
참여국의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담아 발표한 이니셔티브에는 AI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막대한 전력 공급 대책과 반도체 제조에 들어가는 희토류 공급망을 전방위로 다변화하고, 차세대 AI 반도체 설계부터 최첨단 노광장비 유통, 데이터센터 구축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보안성이 검증된 하드웨어만 사용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정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또 회원국 기업 간 장기적인 매매 계약 및 기술 제휴를 촉진하고, AI 기술 혁신·투자를 가속화하기 위한 규제 샌드박스 및 공동 표준연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니셔티브 발표 이후 카자흐스탄 수석 대표가 팍스 실리카 선언문에 공식 서명했다. 카자흐스탄은 핵심광물 자원 부국으로 팍스 실리카가 세력을 기존의 미국·유럽·아시아태평양 중심 기술 동맹에서 중앙아시아로 확장하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팍스 실리카는 평화, 안정, 장기적 번영을 의미하는 라틴어 ‘팍스(pax)’와 반도체 소재 ‘실리카(Silica)’를 합친 말로, 반도체와 희토류, 데이터센터 등 AI 산업 전반의 공급망을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재편하자는 취지에 따라 지난해 12월 미국 주도로 출범한 다자 협의체다. 출범 당시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 일본·호주·이스라엘·영국·싱가포르 등이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미국은 핵심광물과 에너지 원자재부터 첨단 제조, 반도체, AI 인프라, 물류에 이르는 전 세계 기술 공급망 전반에 걸쳐 안정적이고 회복력 있는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목표로 여러 국가들의 연합을 주도하고 있다.
이번 팍스 실리카 정상회의를 앞두고는 유럽연합(EU)과 독일, 네덜란드, 그리스 등이 새롭게 참여해 이들 국가의 가입 서명식이 열렸다. 또 정상회의 마지막 날인 26일에는 아르헨티나·칠레·코스타리카·파나마 등 중남미 국가도 추가로 합류할 예정이어서 참여국은 총 24개국으로 늘어나게 된다.
특히 네덜란드의 참여는 상징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 업체인 ASML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동안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통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미묘한 입장차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ASML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자국 주도의 대중국 첨단기술 수출통제 체계를 우회해 중국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을 의심해 왔다. 반면 ASML 측은 관련 의혹을 부인하며 수출통제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헬버그 차관은 이날 “이틀 전 네덜란드·EU·독일·그리스가 가입국으로 공식 서명하면서 기술 동맹의 축이 완성됐다”며 “특히 ASML 등 반도체 핵심 장비 공급망의 공조가 완벽해졌다”고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이 수석대표로 팍스 실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해 AI 공급망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과 첨단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팍스 실리카 공급망의 핵심축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