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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인의 읽는 클래식 듣는 문학] 마지막 네 개의 노래…결국은 아름다움

중앙일보

2026.06.2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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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1948년 5월에서 9월, 여든네 살의 슈트라우스(사진)는 최후의 작품 ‘마지막 네 개의 노래’를 작곡한다. 노 작곡가의 마음은 회한으로 가득했다. 나치 독일의 음악국 총재로서 문화선전에 협력한 그는 전범재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치감은 컸다. 아름다움의 추구가 정의를 담보하지 못했다. 예술가는 때로 비정치적이어도 된다는 생각은 오류에 불과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들의 권익을 위해 연대하고, 뛰어난 재능을 후원하며 선의의 삶을 나름대로 살아왔지만, 아우슈비츠 앞에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난 시대의 영광이었던 바그너에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끝내 ‘아름다움’을 저버릴 수 없었다. 늦가을 나무에 최후의 순간까지 매달린 채, 곪아 버리기 직전까지 농익은 열매처럼 이 리트(독일 가곡)는 절정과 죽음의 향기를 동시에 내뿜는다.

특히 세 번째 곡 ‘잠들러 가는 길에’에서 슈트라우스는 선율의 한계를 극한까지 확장시킨다. 길게 이어지는 선율은 시어를 떠나 날갯짓한다. 낭송의 호흡과 가사전달, 구조 따위를 괘념치 않는, 취한 영혼의 마지막 아름다운 비상이다. 바이올린이 노래하고 성악은 거의 기악처럼 변용된다. 잠들어 말에서 놓여난 노래의 자유로움이랄까.

시를 쓴 헤세는 이 가곡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기교적이고 세련되고 장인적인 아름다움이 있지만 중심이 없다. 오로지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을 뿐이다.’ 지난 시대의 오류에 대해 거리를 두려는 헤세의 태도가 읽힌다. 그렇다. 슈트라우스도 흔쾌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과오를 불러왔다 하여 외면하려는 것 또한 진실 되다 할 것인가. 슈트라우스는 그저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답했으리라.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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