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임금이 요순(堯舜) 같은 성군이 되셨으면 한 것이지 어찌 제 몸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늘이 내려다보는데 다른 사심(邪心)은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을 아뢸 길이 없으나 잠자코 죽는 것 또한 견딜 수 없으니 임금을 한 번만 뵈올 수 있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1519년 11월 16일)
바로 전날까지 임금을 독대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조광조가 간밤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함께 국정을 논의하던 주요 직책의 동료들도 마찬가지. 어리둥절 하는 사이 파당을 지어 나라를 엎고자 했다는 말이 들리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들은 옥중소(獄中疏)를 올린다. 조선 도학사의 상징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그 불꽃 같은 38년의 삶이 서서히 꺼져가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역사에 등장한 조광조가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사라지기까지 불과 4년, 그의 행적이 궁금하다.
중종의 신뢰 업고 쇄신과 개혁 박차
반정 공신들의 공훈 박탈 무리수
버티던 중종, 공훈 개혁 허락했지만
곧 추종자들까지 체포 후 사약 내려
후사 없자 종손 받아들여 대 이어
결국 복권, 이황 등과 ‘오현’으로 꼽혀
정암 조광조 초상. [사진 위키피디아]
조광조는 “경서에 밝고 행실과 수양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성균관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왔다가 바로 알성시(謁聖試·왕이 문묘 참배 후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정통’ 고급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 조광조는 뜻이 고원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세상을 개탄하여 과거를 위한 글공부를 하지 않았다. 부형과 친족들이 세속과 어긋나서 남의 비방을 살 수 있다며 꾸짖을 정도였다. 장성하면서 성리학과 한 몸을 이루니 그를 애모하여 종유하는 선비가 줄을 이었다.”(중종 10년 6월 8일) 조광조의 나이 34세, 천거(薦擧·추천에 의한 등용)와 과거(科擧)라는 두 차례의 검증으로 국왕 중종의 신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경기도 용인시 상현동에 있는 조광조 묘. [사진 위키피디아]
왕과 하루 세 번 만나며 개혁 고삐 그는 문과 급제 3년 만에 종2품 대사헌에 오른다. 고위 관리를 탄핵하는 이 직책은 경외와 원망을 동시에 받는 자리다. 새로운 제도를 입안하고 부조리를 척결하는 등 왕과 하루 3번을 만난다는 말이 돌 만큼 개혁을 향한 그의 질주는 무소불위의 속도를 보였다. 아내 이씨에게는 양해를 구했다. “내 마음은 나라에 있으니 이제부터 집안일은 돌볼 겨를이 없을 듯하오.”(‘조광조신도비명’)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10년이 지나도록 훈구파 권신들의 전횡에 휘둘리던 차 힘 있는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런 국왕에게 성군(聖君)의 모델을 보여 주며 개혁 군주를 제안하는 조광조. 중종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이 나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는구나!’ 중종은 조광조와 콜라보로 쇄신과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조광조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에 시대를 만난 것에 감격하며 “군주의 마음은 정사(政事)가 나오는 근본”이라고 한다. 그는 경연을 통해 옛 성왕의 도를 강독하고 치도(治道)를 개진하는 등 성군 만들기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림들을 조정 요직으로 뽑아 들였다.
조광조가 기존의 세력과 대항하며 추진한 획기적인 개혁 정책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그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도교 전통의 관청으로, 유교적 정치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사실 미신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가 정치에 관여하여 불러온 폐해도 적지 않은 터였다. 국왕은 그 폐지에 소극적이었지만 결국 조광조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가 글솜씨에 경도되어 있다고 보고 다른 인재 등용의 방식인 현량과(賢良科)를 제안했다. 관료의 자격에 학문과 덕행을 넣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지방 수령과 홍문관 등 각 기관이 추천한 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대책(對策·시정의 문제를 제시하고 그 대책을 논하게 한 시험)으로 시험을 치러 선발하되 과거 급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했다. 조광조의 파격적인 제안으로 김식(金湜)을 포함 최종 합격자 28명이 선발되었다.(중종 14년 4월 13일) 이는 학문과 덕행으로 단련된 사림을 중앙 정계에 참여시켜 도학 정치 구현에 박차를 가하고자 한 것이다. 반대론자들에 의하면 현량과는 조광조 세력의 확대 그 이상이 아니었다.
서울 돈의동 조광조 집터의 표지석. [사진 이숙인]
반정 공신들의 토지·권력 독점 무엇보다 조광조의 개혁 정책에서 가장 큰 사건은 위훈삭제(僞勳削除)다. 그것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자에게 내린 ‘정국공신(靖國功臣)’을 재검토하여 무자격자의 공신호를 박탈하자는 것이다. 사실 중종반정으로 117명의 공신이 책봉되는데, 상당수가 친척이거나 실제 공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토지와 노비, 권력을 과도하게 독점하여 국고 낭비와 정치적 부패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조광조는 공신의 책봉이 문란하게 이루어져 부귀를 추구하는 길이 열렸으며, 이러한 근원을 끊는 계기를 지금 만들지 않으면 영영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중종은 한 번 정한 공신을 개정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기며 허락하지 않는다. 공신 칭호를 받은 자들의 집단적인 반발도 예상한 대로였다.
하지만 조광조 측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대간(大諫)이 공신 개개인의 공적을 들추어 아뢰었다. 4등 공신의 경우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공신의 자제(子弟)나 혼인 관계로 얻은 자가 30명에 이르고, 권간(權奸)에게 뇌물을 바쳐 얻은 자들이 또 30여명에 이르렀다. 조광조가 울분을 터뜨린다. “초피(貂皮·담비 모피)를 뇌물로 주고서 얻은 자가 5~6인이라고 하니, 어찌 공신을 뇌물로 얻는단 말입니까?”(중종 14년 11월 9일) 개혁 세력은 더 나아가 중종 반정을 주도하거나 협조한 자들에 대한 공신 책봉의 기준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정국공신은 명분이 불분명하기에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왕 중종의 존위(尊位)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신들의 공신 개정 요청에 왕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조광조가 아뢰었다. “대신이 다들 옳지 않게 여기는데도 임금의 뜻을 고집하시니, 아마도 임금의 뜻이 치우치게 매인 곳이 계신 듯합니다.”(중종 14년 11월 10일) 사흘 후 위훈삭제가 단행되었다. 왕이 조광조 등에게 부탁한다. “공신호가 삭적되기는 했지만 내려준 모든 잡물과 가옥 등을 도로 거두는 일은 없게 하라.”(중종 14년 11월 13일)
정국공신 개정이 이루어진 이틀 뒤 새벽, 조광조 등의 체포령이 떨어졌다. “임금이 병조판서를 불러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명단을 내렸는데,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중종 14년 11월 15일) 대신들이 왕에게 물었다. “조광조 등은 고서(古書)만 보고 지치(至治·지극한 정치)를 꿈꾼 자들입니다. 이것으로 죄주는 것이 타당하옵니까.” 왕은 말한다. “조정에서 의논한 일이니 조정의 처치에 따라야 한다.” 일단 구속시킨 조광조의 죄안(罪案)을 만들어야 하는데, 임금에게 불려 온 대신들은 “조광조 등은 늘 정도(正道)를 핑계 댔기에 죄에 이름 붙이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한다. 임금도 한마디 하신다. “조광조가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뜻이 있었던 것은 다 안다. 다만 과격한 일이 많아 부득이 죄 주었을 뿐이다.” 성균 유생들이 들고일어나 자신들도 조광조와 함께 옥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200~300명이 연달아 상소하며 왕을 압박했다.
그런 가운데 조광조는 능주(지금의 화순) 귀양길에 오른다. 임금과 조광조의 만남과 행적을 낱낱이 기록해 온 사관들은 이 상황이 너무나 어이없었다. 그들의 사평(史評)은 의미심장하다. “정이 부자처럼 가깝더니 하루아침에 죽이라고 하니 두 임금인 것 같았다.” 조광조 체포와 구속, 그리고 사사(賜死)는 누구의 뜻도 아닌 국왕 중종의 뜻이었다. 중종이 갑자기 돌아섰다고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안은 인간 중종의 마음을 너무 어렵게 했다. 예컨대 유교적 수양과 성군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임금의 내실 생활을 기록하는 여사(女史)를 두자는 제안도 있었다.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글에 능한 여자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왕은 난색을 표한다.(중종 14년 3월 3일)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용인시 수지구 소재). [사진 국가유산청]
죽기 전에 ‘내 죄 무엇이냐’ 물어 1519년 12월 20일, 조광조는 의금부 도사가 들고 온 사약을 적소에서 받았다. 죽기 전에 내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도사는 대답이 없었다. 조광조가 사사될 때 두 아들은 각각 6세, 2세였다. 장남 조정(趙定)은 요절했고, 차남 조용(趙容)은 두 딸을 두었으며 문천군수를 지냈다. 아우 조숭조의 손자 순남(舜男)을 후사로 삼았다.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던 김식은 유배지에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조숭조의 손녀가 김식의 증손자와 혼인하여 김육을 낳는데, 김육은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로 파탄에 빠진 농촌경제를 살려낸 인물이다. 기묘명현 두 개혁가는 넓은 의미의 가족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조광조는 슬픈 개척자의 운명을 맞이했지만 그의 사심 없는 올곧음은 오래지 않아 역사 무대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는 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과 함께 오현(五賢)의 반열에서 존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