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대출이란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시는데, 저는 안 빌리는 게 오히려 손해라고 생각해요.”
직장인 김인재(29)씨는 얼마 전 신용대출 5000만원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다. 아버지(58)는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빚내서 투자한다니 제정신이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1998년 외환위기 때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대출금을 갚느라 10년 넘게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김씨는 “빚이 있어야 자산이 생기는 현실 속에서 빚을 지지 않으면 더 이상하다는 게 우리 세대의 상식으로 굳어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빚에 대한 인식이 부모와 자녀 세대 사이에서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말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36조2547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20대의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지난해 4월 이후 1년 새 124.5%나 늘어 40대(86.8%)와 50대(85.4%) 증가율을 크게 앞질렀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을 ‘위험 감수 행동’이라고 진단했다. 곽 교수는 “2030세대는 한국의 자산 가격이 급격히 오르는 걸 직접 목격한 세대”라며 “월급을 모아 집을 살 수 있었던 부모 세대와 달리 지금 청년들은 ‘돈을 기껏 모아도 이미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린’ 현실을 접하다 보니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단순한 투자 심리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만들어낸 결과”라며 “게다가 일부 성공 사례만 부각되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이 늘고 더 나아가 무기력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도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같은 세대 간 인식 차이의 뿌리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하자 시장은 이를 “빚내서 집 사라”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이후 부동산 불패 신화가 재점화됐다. 반면 2017~2019년엔 정반대의 정책이 이어졌다. 투기과열지구를 지정하고 LTV·DTI를 다시 낮추는 등 강력한 대출 규제가 잇따랐다. 하지만 이런 규제 강화는 청년층에게 “더 늦기 전에 영끌하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신호로 읽혔고, 이후 2030이 즐겨 보는 유튜브와 SNS에서 레버리지 투자를 독려하는 콘텐트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빚지는 게 합리적 선택’이란 인식이 굳어졌다는 분석이다.
신용거래융자로 주식에 ‘올인’한 20대 직장인 이지민씨는 “내 돈만 가지고는 절대 자산을 불릴 수 없다는 걸 친구들도 다 알고 있다”며 “빚지지 않으면 나만 뒤처질 수 있다는 강박감도 크다”고 말했다. 반면 이런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 정모(54)씨는 걱정스럽기만 했다. 정씨는 “딸이 빚을 내서 투자한다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며 “우리 세대는 빚이란 말만 들어도 불안해지는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여기에 같은 2030세대 내에서도 빚을 내 투자한 결과가 크게 엇갈리면서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 2020~2021년 저금리 시기에 영끌에 나섰던 청년층은 자산을 불린 경우가 많은 데 비해 2024년 이후 고금리 시기에 같은 전략을 택한 2030은 이자 부담에 허덕이는 경우가 적잖다. 곽 교수는 “예전엔 또래끼리 비슷한 처지였는데 어느새 누구는 아파트를 샀고 누구는 여전히 빚더미에 앉아 있으면 후자의 소외감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며 “세대 간 격차 못지않게 세대 내 격차가 청년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짚었다.
빚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청년층에 널리 퍼진 배경에는 노동소득으론 자산을 늘릴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층 고용률은 45%대에 머물러 있는 반면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2억원을 넘어섰다. 직장인 류선민(31)씨는 “월급 250만원 받아 꼬박꼬박 적금해도 평생 사지 못할 집을 빚내서 ‘대박’이 나면 단번에 구할 수 있는 현실에 결국 나도 빚을 지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청년 일자리 정책의 실패가 만든 결과”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청년 일자리는 늘 정책의 수식어처럼 취급돼 왔을 뿐 실효성 있는 정책 전환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며 “노동계와 경영계가 함께 책임지고 청년들이 단타가 아니라 꾸준히 자산을 쌓을 수 있는 대책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
빚에 대한 2030의 부담감이 적은 데는 청년층에 특히 너그러운 정부 정책이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직장인 한정수(30)씨는 “주변에서 빚을 갚지 못해 채무조정을 받았다는 친구들 얘기를 듣다 보면 빚지는 두려움보다는 ‘어차피 안 되면 정부가 어떻게든 도와주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성실하게 빚 갚는 사람만 손해 보는 거 아니냐는 말이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라고 전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정부의 부채 경감 정책이 반복될 경우 ‘버티면 결국 해결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며 “특히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시기일수록 ‘개인의 책임’이란 기본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