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다 준이치(安田淳一) 감독이 23일 서울 충무로 서울영화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지난해 일본 도쿄의 한 독립영화 극장에서 단관 개봉한 뒤 일본 전역 380개 관으로 상영관 수를 늘리며 흥행한 영화 ‘사무라이 타임슬리퍼’는 일본 독립 영화의 두 번째 기적이라 불린다. 2018년 같은 방식으로 흥행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에 이어 초저예산(2억원)으로 100만 관객을 끌어모으는 ‘대박’(90억원 수익)을 냈다.
영화는 에도 막부 말기, 목숨을 걸고 도막파(막부 타도 세력) 사무라이와 결투를 벌이던 사무라이 코사카 신자에몬(야마구치 마키야)이 벼락을 맞고 현대 교토의 시대극 촬영장으로 ‘타임슬립(시간을 뛰어넘어 이동함)’하는 코미디다.
코사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사가 아니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사무라이를 돕겠다며 촬영장에 난입했다가 PD에게 맞아도 휘둥그런 눈으로 칼을 칼집에 넣으며 사과한다. 딸기 케이크를 먹으면서는 “이렇게 맛있는 과자가 평범한 음식이 됐다니, 일본이 부자가 되었군요”라며 눈물을 글썽인다. 작은 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선 평범하고 좋은 이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가 일본 사극에서 ‘죽는 역할 전문 배우’가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의 끝에는 예기치 못한 긴장감과 찡한 감동이 찾아온다. 지난해 열린 제48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수백억 원 규모의 대작을 물리치고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7관왕을 달성했다.
영화를 만든 야스다 준이치(59) 감독은 교토에 인접한 조요시에서 3대째 쌀농사를 지어온 농부다. 앞서 독립 영화 2편을 만들었지만, 이번 영화로 일약 메이저 감독으로 데뷔했다. 23일 서울 중구 서울영화센터에서 만난 그는 “요즘 농사일이 바쁘다”며 웃었다. 24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방한해 이틀간 숨 가쁜 일정을 보낸 뒤 출국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인터뷰 중 자신이 전략적으로 쓴 독립 영화 흥행 비법을 자세히 풀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사무라이라는 소재를 택한 이유는
A : 일본인은 사무라이를 좋아하지만, 실제 과거 사무라이의 94%는 저 같은 농부였다. 쇼군처럼 유명한 사무라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하다. 주인공 코사카도 평범한 사무라이다. 그래서 사무라이의 부정적 측면을 빼고, 밝은 면,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은 선택이었다. 일본인들도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사무라이의 모습이 아니라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영화 ‘사무라이 타임슬리퍼’의 한 장면. [사진 트리플픽쳐스]
Q : 주인공이 ‘죽는 역할’ 연기를 열심히 한다. 이런 설정을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A :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저는 데뷔작 ‘권총과 달걀프라이’부터 평범한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아왔다. 곤란한 상황에 놓인 초심자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평범한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주로 만들고 있다
Q : 그래도 전문 무사인데, 타임슬립 이후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쉽게 눈물짓는 감성적 모습은 의아하다
A : 과거 주인공은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생명에 대한 인식이나 도덕관념이 달라진다. 이를 통해 사무라이의 안 좋은 점이나 생명 경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담고 싶었다.
Q :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도 저예산 영화가 대작 영화를 넘어 크게 히트했다. 왜 이런 일이 동시에 벌어졌을까
A : 많은 예산이 드는 영화를 제작하려면, 유명한 원작과 스타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대작을 만들 때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제작위원회’라는 시스템이 있다. 좋은 방식이지만 이를 통하면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어서 관객들이 지겨워한다. 반면 저예산 영화는 도전할 수 있는 요소가 훨씬 많다. 신선하면서도 이야기가 좋다면 관객 반응이 좋다. 이런 영화들이 성공할 수 있는 배경(관객이 비슷한 대작에 지겨워진 상황)이 형성됐던 것 같다.
영화 ‘사무라이 타임슬리퍼’의 한 장면. [사진 트리플픽쳐스]
Q :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흥행 이유를 분석해 전략으로 삼았다던데
A : 제가 ‘밥’이라는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름대로 얻은 작은 성과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300만엔(약 2800만원)을 투자한 ‘카메라…’가 30억엔의 수익을 올리며 성공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때, 작은 예산으로도 흥행 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하단 생각이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일본의 100년 영화사 중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한 기적이지만, 기적이 한번 일어났다면 두 번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석을 했고 똑같은 전략을 썼다.
Q : 분석 결과 나온 전략은 무엇인가
A : 우선은 시나리오와 각본이 굉장히 재밌어야 한다. 각본 분석을 해보니, 처음 37분은 위화감 없이 관객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며 궁금증을 유발하더라. 이후 이야기의 40%는 위화감(긴장감)을 좀 일으키면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느낌, 그리고 마지막 10%는 그걸 앞에 깔아둔 복선과 함께 해소하면서 관객에게 시원함을 주는 구조였다. 이건 작품에 관한 내용이고 프로모션(홍보) 전략도 중요하다. ‘카메라…’는 해외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모습과 국내 극장에서 관객들이 크게 웃거나 감동하여 손뼉 치는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SNS를 통해 홍보했다. 일본 관객은 좀처럼 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이 크게 웃거나 손뼉을 칠 만한 장면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반응이 나올만한 장면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결국 ‘카메라…’처럼 독립영화 극장 ‘시네마 로사’에서 단관 개봉으로 시작해 메이저 배급사의 연락을 받고 전국 개봉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Q : 일본은 메이저 영화감독이 되는 길이 한국보다 다양하게 열려 있나
A : 한국은 독립영화 데뷔를 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많아서 시스템이 더 잘 돼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시스템이 경직돼 있다는 얘길 들어서 놀랐다. 어떤 루트로 감독이 되건, 많은 사람이 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려면 어떤 실력이나 자질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는 전제하에, 일본이 한국과 다른 점은 극장 문화인 것 같다. 일본은 멀티플렉스가 덜 발달했고, 독립영화 극장에는 ‘극장 팬’들이 있다. 극장마다 특징이 있는데, 그런 특징을 좋아하는 관객들은 이 극장이 선택한 영화를 믿고 본다. 즉, 시네마 로사에서 개봉이 정해지면 한번 상영할 때마다 관객 200명을 일단 확보한다는 의미다. 어떤 극장은 에로물만 취급하기도 한다. 감독이 어떤 루트를 거쳐, 얼마를 들여 찍었든 극장의 선택을 받으면 입소문의 첫 번째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요즘 시네마 로사 앞에는 전국에서 온 독립 영화감독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Q : 향후 계획은
A : 이제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히트작을 만들 수 없다. 관객이 그런 걸 원하지 않을 테고, 투자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립영화가 히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야마다 요지 감독을 좋아해서 48부작으로 끝난 ‘남자는 괴로워’를 향후에 리부트하고 싶다. 농사도 계속할 것이다. 1등급 쌀을 만드는 게 가장 행복하다. 다만 농사나 영화 제작이나 ‘좋은 것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는 굳은 심지는 똑같이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