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후보,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이회창 총재가 어제 TV 토론을 보고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이 총재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게 낫겠어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가감 없이 그 말만 전달할게요. "
2002년 5월 14일 아침, 이중재 전 의원이 찾아왔다. 6선 당 원로인 그는 내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어쩐 일인지 우물쭈물하면서 제대로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야 어렵게 입을 땠다.
알고 보니 그는 ‘심부름꾼’이었다.
전날 밤 있었던 서울시장 후보 첫 TV토론에 대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온 것이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이 총재의 발언’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2002년 6월 9일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와 영등포 거리 유세를 함께 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내가 기억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이 후보가 토론을 너무 못하고 쩔쩔매더라. 이런 식이면 내 선거(그해 연말 대선)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 "
불난 집에 부채질해도 유분수지, 아니 어떻게 당수가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가장 심란해 할 후보에게 적어도 “수고 많았다. 다음 토론에선 더욱 분발하라”고 격려 한 마디 해주는 게 도리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후보인 나를 걱정하거나 격려하기는커녕 자신의 선거부터 먼저 걱정한 거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날 있었던 KBS 주관 첫 후보자 TV 정책토론회의 상대는 37세의 새천년민주당 김민석(현 국무총리) 후보였다.
선거 초반부터 판세는 팽팽했다. 그해 5월 7일 조선일보가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나(34%)와 김민석 후보(35.3%)의 지지도 격차는 오차 범위 내인 1.3%포인트에 불과했다. 이런 경향성은 선거 내내 크게 바뀌지 않았다. 5월 27일 나온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도 나(32%)와 김 후보(32.2%) 간 격차는 0.2%포인트에 그쳤다. 선거를 코앞에 둔 6월 초까지도 언론은 ‘초박빙’으로 판세를 매기며 결과를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
젊은 패기와 뛰어난 언변으로 무장한 그는 정책설명보다 공격에 집중했고, 토론은 시작부터 팽팽한 공방으로 흘러갔다.
2002년 5월 13일 밤 KBS에서 주관한 첫 서울시장 후보 TV 정책토론회. 가운데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KBS 화면 캡처
말로 맞서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상대의 공세에 일일이 맞받아치기보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정책과 공약을 차분히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토론은 내가 수세에 몰린 듯한 인상을 남겼다.
‘서울시민들이 오늘 내가 졌다고 생각하겠구나.’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쉽고 답답한 마음으로 밤을 보냈는데, 이튿날 아침 이중재 전 의원이 찾아와 이회창 총재의 의견을 전한 것이다.
나는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캠프는 물론이고 이 총재까지 낙제점을 줬으니 대다수 시민의 생각 역시 비슷할 거라는 인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