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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은의 트렌드터치] 시간 주권

중앙일보

2026.07.12 08:06 2026.07.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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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2007년, 인천공항이 패스트트랙 도입을 검토하자 사회는 들끓었다. “돈 좀 있다고 줄을 안 서도 된단 말인가.” 온라인은 불공정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고, 뉴스는 연일 공정성 논란을 다루었다. 당시 우리는 믿고 있었다. 대기 줄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최후의 공평함이라고.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서비스를 받고, 기다림의 고통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 우리는 불편함보다 불공정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시간 절약하게 해주는 기술 넘어
일 안해도 되는 시간 확보가 관건
시간 주권이 이 시대 부의 척도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스스로 그 줄에서 이탈하기를 갈망한다. 2007년의 패스트트랙 논란은 단순한 공항 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 사회를 향한 거대한 예고편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가 던진 질문은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가”였지만, 2026년의 대답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돈을 지불하고 줄을 건너뛰는 것을 넘어, 아예 줄을 삭제하고 있다.

한집 배달을 위해 기꺼이 추가 요금을 결제하고, 놀이공원의 익스프레스 패스는 당연한 옵션이 되었다. 새벽배송과 원클릭 결제는 ‘대기’라는 개념 자체를 우리 삶의 궤도에서 지워버렸다. AI 요약·AI 회의록·AI 비서와 같은 도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이상 정보를 원해서 기술을 곁에 두는 것이 아니다. 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시간을 벌기 위해 기술을 활용한다.

단순히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을 넘어 내 시간의 흐름을 내가 완전히 통제하고,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획득하는 능력, 시간 주권(Time Sovereignty)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부의 단위는 제곱미터에서 ‘분(minute)’으로 옮겨가고 있다. 누가 더 많은 시간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가, 즉 누가 자신의 시간에 대한 주권을 얼마나 확보했느냐가 새로운 계급을 가르는 잣대가 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부터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기술을 도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은 우리를 더 바쁘게 만든다. 넷플릭스는 탐색 시간을 줄여주지만 다음 영상을 자동으로 재생하며 우리의 저녁을 가져간다. SNS는 효율적인 소통을 약속하지만, 끊임없는 알림으로 우리의 몰입을 방해한다. 기업들은 고객의 시간을 절약해주겠다고 광고하면서도 사실은 고객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차지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인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압축했더니, 그 틈새로 더 많은 업무와 더 많은 콘텐트가 밀려들어 온 꼴이다.

대기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이제는 일정표라는 더 정교한 감옥에 갇혔다. 이메일 작성 시간은 줄었지만 이메일의 개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회의록은 AI가 순식간에 요약해주지만 정작 회의의 빈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더 빠르게 달리고 있고, 우리 삶의 정지 버튼은 고장 난 지 오래다.

진정한 럭셔리가 물질의 소유를 넘어섰다는 말은 진부할 정도다. 한때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브랜드를 과시했던 사람들은 이제 캘린더를 자랑한다. 빈칸이 있는 오후, 랩톱을 열지 않는 주말, 답장이 조금 늦어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평온함, 그리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텅 빈 시간. 누군가 내 시간을 함부로 재단하지 못하게 막아설 수 있는 사람, 즉 ‘시간 주권자’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부의 권력자다.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더 생산성을 높이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시간을 인간에게 돌려주느냐에 달렸다. 고객의 시간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기업은 사랑받을 것이고, 직원의 저녁 시간을 온전히 보장하는 조직은 최고의 인재를 얻을 것이다. AI 시대의 혁신은 기능의 고도화가 아니라 ‘얼마나 시간을 되찾아주는가’라는 척도에서 측정될 것이다.

결국 시간 주권이란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비싼 시간을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시간을 비워 두느냐다. 시간을 절약하는 기술은 이미 도처에 널려 있다. 하지만 그 기술로 확보한 시간을 ‘무엇을 하지 않는 데’ 쓸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20년 전 우리는 돈으로 시간을 사는 사회를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기꺼이 돈을 내고 하루를 되사고 있다. 최고급 명품시계보다 비싼 것은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중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한 시간이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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