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대만 동남부 란위섬의 타오족 원주민들이 ‘황금 우정’이란 뜻의 전통 목선 오바얀을 타고 필리핀 최북단의 바탄섬으로 항행 준비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필리핀 최북단의 바탄군도(Batanes·바타네스)를 둘러싼 중국학계발 영유권 주장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역사적 판결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분쟁이 시작되는 분위기다.
이번 영유권 논쟁은 중국의 학술 세미나에서 시작됐다. 지난 6월 30일 광저우 지난대(暨南)대 국제관계학원 필리핀 연구센터는 ‘일본·필리핀의 경계 획정 배경에서 바탄섬 주권문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참석한 중국 10여개 기관 학자들은 지리·문화·역사·법률적으로 바탄군도의 영유권이 필리핀이 아닌 중국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차준홍 기자
필리핀 루손섬 북쪽으로 162㎞, 대만 최남단 핑둥에서 남쪽으로 190㎞에 위치한 바탄군도는 남중국해와 서태평양을 잇는 바시해협의 정중앙에 자리한다. 세미나에서 중국 학자들은 바탄군도가 지리적으로 대만섬의 자연적 연장이며, 문화적으로 섬 주민 이바탄 족은 대만 원주민과 동일 계통이라고 주장했다.
또 역사적으로 19세기 이전 스페인이 바탄군도를 실효 지배한 적이 없으며, 법적으로도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파리조약이 필리핀 영토의 북방한계선으로 정한 북위 20도선을 벗어난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센터는 7일 지난대 홈페이지에 “국가의 중대한 전략적 필요에 봉사했다”고 평가한 글을 올렸지만, 사흘 뒤인 10일 돌연 삭제한 상태다.
지난 6월 30일 중국 광저우의 지난대학 구역국별연구원 및 국제관계학원 필리핀 연구센터가 개최한 “일본·필리핀 ‘경계획정’ 배경에서 바탄섬 주권 문제 학술 세미나”에 참석한 학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위챗캡처
영유권 논란은 11일 국수주의 성향의 매체 환구시보가 “국내 학자, 바탄군도 주권을 주장했다”는 제목의 전면 기사를 게재하면서 확대됐다. 중국 외교부는 “학계의 견해에는 논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고 프랑스 AFP가 보도했다.
필리핀은 강하게 반발했다. 에두아르도 오반 국가안보보좌관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허위사실을 반복하며 존재하지 않는 모호함을 만들려는 시도를 간과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안토니오 카르피오 전 대법관은 “바탄군도가 대만의 자연적 연장이라는 주장을 중국은 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하지 않느냐”며 “바호 데 마신록(스카버러 암초, 중국명 황옌다오)과 함께 재판을 받자”고 마닐라타임스에 말했다. 필리핀 외교부는 “품위 있는 대응조차 아깝다”며 “주권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여론전을 확대했다. 관영 신화사의 소셜미디어 뉴탄친(牛彈琴)도 11일 “게임에서 치명적인 수는 정면 대치가 아니라 상대가 뛰쳐나가도록 판을 바꾸는 것”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신화사는 지난대의 홍보 부족을 지적하며 “이런 논의는 더 알려지고, 기억돼야 한다”며 여론전을 독려했다.
바탄군도 논란이 중국의 회색지대 전술(Gray-zone strategy)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회색지대 전술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외교·법률·경제·정보전 등을 활용해 상대국의 이익을 조금씩 잠식하는 전략을 말한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해양 회색지대 전술 감시단체인 씨라이트(SeaLight)는 X(옛 트위터)에 이번 세미나가 지난 5월 말 도쿄에서 열린 일본·필리핀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만 동쪽 해역의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 협상에 대한 대응 성격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 차원의 공식 선언 없이 학술·관영 매체가 앞장서 영유권 근거를 축적하는 ‘법률전’의 일환이라며 “바탄군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란만으로도 향후 대만 동쪽 해역에서 중국 해경 함대의 ‘순찰’을 정당화하는 데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대만은 제1 도련선(오키나와·대만·필리핀을 잇는 섬의 사슬)을 둘러싼 법률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우려했다. 대만의 국제관계학자 린취안중(林泉忠)은 13일 홍콩 명보 칼럼에서 “1898년 파리조약의 공백에도 1900년 미국이 스페인과 맺은 워싱턴조약, 100년이 넘는 필리핀의 실효 통치, 역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주권을 주장한 사례가 전무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며 중국의 영유권 논란을 일축했다.
대신 이번 사례를 “베이징의 새로운 영토 주장이 아닌 법리적 탐색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탄제도의 최종 영유권의 변화 여부가 아니라 역사·법리·지정학적 전략이 다시 회오리치면서 제1 도련을 둘러싼 정치·안보 질서가 조용하면서도 새로운 경쟁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며 국제사회의 환기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