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찰스 3세 국왕의 여동생인 앤 공주가 남편 티머시 로렌스 경(왼쪽 넷째)과 함께 14일 부산시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헌화 후 참배하고 있다. [부산사진공동취재단]
14일 오전 9시 부산시 남구 재한유엔기념공원. 정문을 지나 중앙광장을 천천히 걸어 들어온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여동생인 앤(75) 공주는 남편 티머시 로렌스 경과 함께 영국기념비 앞에 멈춰 섰다. 잘 정돈된 잔디 위로 묘비가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앤 공주는 붉은 양귀비가 장식된 추모 화환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엄숙한 침묵이 공원을 감싸는 사이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영국군을 향한 추모의 시간이 이어졌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8년 만에 방한한 앤 공주가 첫 공식 일정으로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공식 묘지인 이곳에는 한국전쟁에서 숨진 14개국 2339명의 유엔군 장병이 안장돼 있다. 이들 중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 출신 장병은 1598명에 달한다. 영국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앤 공주는 이날 기일을 맞은 영국군 M 호건 이병의 묘를 찾아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쳤다. 또 영국 최고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참전 장병들을 기리며 묵념했다. 한국전쟁 당시 빅토리아 십자훈장은 모두 4명의 영국군에게 수여됐으며, 이 가운데 3명이 재한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앤 공주는 “전사자와 참전용사들이 크게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참배를 마친 뒤에는 한국전 참전용사인 류영봉(92)·김응수(94)·정식현(95)씨와 차담을 갖고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앤 공주는 참전용사들에게 “위대한 희생과 헌신에 깊이 감사한다”는 뜻을 전하며 예우를 표했다.
추모 일정을 마친 앤 공주는 곧바로 부산항으로 이동해 한·영 해양 협력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이번 부산항 방문은 영국의 항로표지기관인 ‘트리니티하우스’가 지난해 4월 자국의 역사적 문화유산인 등대 렌즈를 한국에 영구 임대한 것을 계기로 마련됐다. 앤 공주는 트리니티하우스의 최고 책임자를 맡고 있다.
영국 펜딘 등대에서 123년간 사용된 대형 렌즈는 지난해 11월 부산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오는 15일 경북 포항 국립등대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해양수산부는 감사의 뜻을 담아 펜딘 등대와 국립등대박물관, 호미곶등대를 형상화한 전통 자개 공예 작품을 앤 공주에게 전달했다.
앤 공주가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HD현대]
최근 영국은 인도·태평양 지역과의 협력을 확대하면서 조선·해운·항만 경쟁력을 갖춘 한국과의 협력을 중요한 외교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세계 2위 환적항이자 글로벌 물류 허브인 부산을 찾은 것도 이러한 전략과 맞닿아 있다. 앤 공주는 부산 일정을 마친 뒤 울산 HD현대중공업을 방문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앤 공주에게 조선 분야 기술력과 경쟁력을 직접 소개하며 “영국은 단순한 협력 국가가 아닌, HD현대의 시작을 함께한 특별한 파트너”라고 했다. 앤 공주는 이후 서울로 이동해 이재명 대통령을 예방했다.
앤 공주는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외동딸이자 찰스 3세 국왕의 유일한 여동생이다. 한 해 400~500건의 공식 일정을 소화하며 ‘가장 열심히 일하는 왕실 구성원’으로 꼽힌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승마 종목에 출전한 영국 왕실 최초의 올림픽 선수이기도 하다. 앤 공주는 오는 15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교육·문화·과학기술 교류 일정 등을 소화하며 왕실 외교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