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성 북한 내각총리(왼쪽 세번째)가 지난 12일 톈진의 장성자동차공장을 참관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북·중 우호조약) 체결 65주년을 계기로 지난 10일부터 사흘간 중국을 방문한 박태성 북한 내각총리가 현지에서 물류·교통·에너지·관광 분야와 관련한 일정을 소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내 정책 집행을 총괄하며 경제 사령탑 역할은 하는 박태성의 동선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중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박태성은 지난 10일 당·정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도착한 뒤 북·중 우호조약 체결 6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정치 지도자들과의 고위급 교류를 가졌다. 이후 방중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베이징과 톈진의 주요 경제 관련 시설을 집중적으로 참관했다.
우선 방문한 곳은 ‘베이징시 도시철도 관제센터’다. 중국 관영 CCTV에 따르면 박태성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은 센터에서 철도 환승 방식과 노선망 운영 등에 대해 세부적인 질문을 하면서 중국의 도시철도 건설 현황을 살폈다. 중국 내 철도 인프라를 살펴본 것인데, 앞서 김정은이 한국의 KTX 고속철도에 깊은 관심을 나타낸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김정은은 2018년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평창올림픽에 갔다 온 분들이 말하는데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고 언급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장을 포함한 고위급 대표단이 2018년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KTX에 탑승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특히 김정은은 북한의 교통 인프라가 한국만 못하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했는데, 실제로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 철도는 마라토너보다 느리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 내 철도 인프라 실사 경험이 있는 안병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북한경제포럼 회장)은 “북한 내 낙후된 일부 철도 구간의 경우 운행 속도가 시속 10~20㎞에 불과했다”면서 “엘리트 마라톤 선수들이 평균 시속 20~21km의 속도로 달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철도 인프라가 얼마나 낙후돼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만성적인 경제난과 대북제재로 인해 항공편이 마땅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김정은은 안전문제 등을 고려해 철도를 주요 이동수단 중 하나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김정은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할 때도 전용열차를 활용했다. 특히 북한은 2018년 9월부터 평양 시내에서 신형 궤도전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김정은은 해당 전차를 만든 송산궤도전차 사업소를 찾아 직접 시제품을 시승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박태성이 톈진에 있는 장성자동차(長城汽車) 공장을 참관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김정은은 자동차 광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전용차량으로는 독일 벤츠사의 최고급라인인 마이바흐 세단과 SUV를 활용하는 모습이 북한 매체에서 자주 포착된다. 2020년 8월에는 일본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의 SUV를 직접 운전해 수해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후계자 시절인 2010년에는 독일 아우디의 스포츠카 스타일의 고성능 모델인 R8과 S8이 중국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 정황이 포착됐는데,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정은이나 그의 형인 김정철의 차량일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4년 6월 19일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24년만에 방북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선물받은 러시아산 최고급 리무진 '아우루스'를 직접 운전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옆에 앉은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보다 먼저 운전대를 잡았다. 스푸트니크·로이터, 연합뉴스
정상외교에서도 김정은의 자동차 사랑은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1차 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 6월 12일 당시 회담장인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에서 함께 산책을 하면서 자신의 전용 차량인 ‘캐딜락 원’을 보여줬다. 김정은은 차량 앞으로 다가가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관심을 나타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열렸던 2024년 6월에도 김정은은 푸틴에게 선물 받은 러시아의 고급 차량인 ‘아우러스’를 직접 운전하면서 푸틴과 대화를 나눴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자동차에 대한 김정은의 관심은 차종에도 구분이 없었다”면서 “이동식발사대(TEL) 차량 개발이 한창이던 집권 초기에는 관련 현지지도가 준비된 오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새벽에 직접 운전해 현장을 방문해 생산 현장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관영매체를 통해 전차·비행기는 물론 지게차까지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공개한 적도 있다.
박태성 북한 내각총리(왼쪽 세번째)를 단장으로 하는 북한 당·정부대표단이 지난 12일 톈진항을 참관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박태성은 중국의 대표적인 물류기지인 톈진항도 참관했다. 톈진항은 AI(인공지능)·IoT(사물인터넷)·5G(5세대 통신망)·최신 하역장비 등 신기술을 적용해 하역·운항·통관·운송을 자동화·최적화한 중국의 대표적인 스마트 항만이다. 나선·원산 등을 대형 항만 입지를 가진 북한의 관심을 끌 만한 아이템이다.
이밖에 박태성은 톈진 하이허 강변에서 중국 측 인사들과 환담을 나누면서 야경을 즐기기도 했다. 이는 김정은의 역접사업인 관광업과도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일정이다. 북한은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삼지연 지구, 마식령·금강산지구 등에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모색하고 있다.
앞서 김정은은 2024년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 직후 완공을 앞둔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를 찾아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관광업을 발전시키면 지방의 진흥과 나라의 경제 장성을 추동하는 또 하나의 동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금강산 관광지구와 갈마해안관광지구를 연결하는 관광 문화지구를 잘 꾸리며 삼지연 지구의 산악 관광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들의 관광 자원도 적극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박태성 북한 내각총리(왼쪽 세번째)가 지난 12일 톈진 하이허 강변에서 중국 측 인사들과 환담하고 있다. 대표단은 지난 12일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을 참관하기에 앞서 톈진시의 여러 곳을 둘러봤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만성적인 에너지 난에 시달리는 북한 입장에선 자원 재사용도 주요 관심사안 중에 하나다. 박태성이 방문한 톈진시 중국자원순환집단유한공사 녹색저탄소순환경제 시범기지는 고철, 전자제품, 전기차 배터리, 풍력 및 태양광 발전 장비,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활용 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북한도 유엔이 주도하는 탄소배출권사업이나 ‘재자원화’(자원 재활용)를 주요 경제정책 과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총리를 비롯한 북한 주요 관료의 해외 시찰은 김정은에게 상세한 보고가 이뤄지는 만큼 김정은의 관심사가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향후 중국과의 밀착 과정에서 박태성이 시찰한 분야에 대한 협력방안이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