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의 생명 윤리에서 타협할 수 없는 핵심은 ‘인간의 생명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형성된 바로 그 시점부터 고유한 DNA를 가진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잠재성과 인격성을 가진다.
그러기에 가톨릭에서 태아는 ‘임신부 신체의 일부’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태아는 비록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지만, 보호받아야 할 ‘독립된 하나의 인간 존재’이다. 따라서 낙태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단순히 약물을 먹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무력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이다.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격성 지녀
낙태는 무력한 생명 짓밟는 행위
정부의 낙태약 허용 검토, 안될 말
가톨릭교회가 낙태 약물에 우려를 표명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약물이 가진 ‘접근의 용이성과 편리함’이 초래할 생명 경시 풍조 때문이다. 기술의 편리함이 인간의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다.
과거의 낙태는 수술이라는 물리적·의료적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심리적 부담감, 두려움, 그리고 병원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 등은 역설적이게도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도덕적 보루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낙태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온몸으로 깨닫게 만드는 제동 장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낙태 약물은 알약 몇 알을 삼키는 것만으로 남모르게 임신을 종결할 수 있게 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의 무게가 ‘화학적 지우개’로 손쉽게 지울 수 있는 불편함 정도로 추락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낙태 약물에 반대한다고 해서, 위기 임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절망하는 여성들의 처지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여성들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깊이 공감한다. 오히려 교회는 위기 임신으로 인한 고통을 개인의 영역에 가두어두지 말고,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 궁핍, 사회적 시선, 파트너의 외면 속에서 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의 절망은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낙태를 결심하는 이유가 사회에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낙태는 여성의 고통을 지우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낙태를 통해 태아의 생명을 빼앗았다고, 여성이 짊어져야 할 사회의 무게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임신한 여성을 낙태로 몰아가는 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일이 더 소중하다. 원치 않는 임신을 유발한 남성의 책임, 그리고 한 아이와 어머니를 품어주지 못하는 사회적 지원 시스템의 부재를 ‘약물 복용’이라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몰아 가지 말자는 말이다.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생명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건 단순히 교리 때문이 아니다. 인간존엄성이라는 인류가 역사를 통해 이룩한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효율성과 편리를 최고로 여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위협받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 인간이 얼마나 생산성이 있는지, 얼마나 환영받는 환경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 지금 위기에 처한 임신부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태중의 아이를 지우는 약물이 아니다. 그 생명을 함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회적 연대와, 그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겠다는 따뜻한 손길이다.
최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먹는 낙태약 허용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낙태에 대한 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더라도 낙태약 판매부터 시작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좀 실용적으로 접근하자”고 했다. 올해 초에 있었던 연명치료 중단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 지시에 이어 또다시 생명윤리에 반하는 지시이다. 한성숙 국무총리가 “워낙 예민한 사안이니 관련 부처와 함께 안건을 준비해 다시 논의하겠다”며 급하게 수습했지만, 대통령의 지시를 쉽게 물리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업무지시를 한 이 대통령도, 지시를 이행할 한 총리를 비롯한 여러 관계 장관들도 모두 태아였다. 생명을 가진 모두는 기적처럼 이 땅에 태어났다. 태어날 수 있었기에 지금 이 글을 볼 수 있다. 먹는 낙태약 허용에 대해 다시 고민해 주길 바란다.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