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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연 스핀오프 내달라”…관객 홀린 나홍진의 ‘평범한 그녀’

중앙일보

2026.07.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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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필름 IN] ‘호프’로 본 신 여성 히어로

‘호프’를 보다가 감탄했다. 정호연이 등장하는 순간 감탄했다. ‘호프’ 의 전반부 한 시간은 액션이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뭐가 뭔지도 알 수 없다. 일단 달린다. 관객도 함께 달리면서 알아내야 한다. 주연과 조연 캐릭터들이 마구 중간에 끼어들어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그 속도전 속에서도 영화가 잠깐 멈춘다. 정호연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호프’

‘호프’

정호연은 영화의 무대인 호포항 출장소 순경 임성애다. 도무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할 리 없을 것 같은 무대에서 갑자기 등장한다. 괴물에게 쫓기던 경찰소장 고범석(황정민)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몰던 경찰차를 잠시 멈추고 육중한 유탄 발사기를 쏜다. 나는 나홍진 감독이 이 장면을 꼭 찍고 싶었구나 싶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다. 피해자였다. 아니면 차라리 귀신이었다.

사실 나홍진의 세계에 여성이 중심일 수는 없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극한까지 고문하는 험한 세계관에서 험한 일은 험한 놈들이 맡아야 한다. 나는 정호연이 등장하는 순간, 내가 예전 나홍진 영화들로부터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것을 보게 될 거라고 확신했고, 그 확신은 맞았다. ‘호프’는 달리는 액션 영화다. 선과 악의 경계도 마지막 순간 비교적 나뉜다. 그러니까 ‘호프’는 나홍진의 첫 번째 순수한 장르영화다. 순수한 장르영화를 만들면서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장총을 자유자재로 쏘는 여성 액션 히어로 하나 정도는 넣어도 괜찮다. 영화 자료집을 보면 ‘야전병원에서 훈련받아 전투용 소총을 능숙하게 다룬다’는 설명이 있다. 아무 필요도 없는 설명이다.

나는 여성 액션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다. 내가 키도 작고 마른 남성인 탓에 육체적으로 좀 밀리는 주인공을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던 걸 수도 있다. 성룡의 영화를 보고 나면 꼭 양자경 영화도 봤다. 이 장르의 최고 거장은 제임스 카메론이었다. ‘에이리언 2’(1986)와 ‘터미네이터 2’(1991)에서 그는 여성 캐릭터도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사실을 ‘시장’에 알렸다는 것이다. 돈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니키타’(1990), ‘롱 키스 굿나잇’(1996) 같은 영화들도 그 즈음 나왔다. 나는 그 영화들이 여성의 액션을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압도적인 힘에서 밀리기 때문에 영리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했다. 80년대 남성 액션 히어로들은 육체는 강건하고 머리는 나빴다. 그 시대도 ‘다이하드’(1988)의 등장으로 인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슈퍼걸 흥행 참패? 완벽만 추구했기 때문
여성 액션 영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남성 액션 영화의 변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다이하드’는 할리우드의 경향을 바꿨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타 스탤론, 척 노리스 같은 양반들이 80년대 액션을 지배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완벽하고 무뚝뚝한 인간 병기에 질려가고 있었다. 머리가 슬슬 벗겨지려는 왜소한 중년 경찰이 주인공인 ‘다이하드’의 성공은 80년대의 막을 내려버렸다. 모두가 좀 더 현실적인 액션 히어로를 원했다. 비교적 평범한 배우들이 주먹을 휘두르는 시대가 됐다. 그 전통은 ‘본’ 시리즈까지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여성 액션 영화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원티드’(2008)와 ‘솔트’(2010)처럼 예전이라면 남성이 하던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는 그 절정이었다. 관객들은 보다 많은 여성의 서사를 영화로 보고 싶어 했다. 여성 서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여성 서사 영화들은 한여름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여성 서사를 블록버스터로 보고 싶었다. 마침 2010년대는 디즈니와 마블의 시대였다. ‘스타 워즈’ 주인공을 여성으로 하고, 마블 영화 주인공도 여성으로 바꾸면 된다. 사실 모든 게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슈퍼걸’

‘슈퍼걸’

사실 나는 이 글을 얼마 전 개봉한 ‘슈퍼걸’을 보고 나서 쓰고 있다. DC는 지난 몇 년간 리모델링 중이었다. 마블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만들던 제임스 건을 불러들여 ‘슈퍼맨’을 다시 만들었다. 그 유니버스를 확장시키려면 속편의 성공이 가장 중요했다. ‘슈퍼걸’이다. 그런데 망했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는 더 망했다. 제임스 건의 DC 유니버스는 이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액션 영화를 기똥차게 만들던 사람들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순간 예술적, 사업적 판단을 다루는 뇌 조직이 쪼그라든다. 똑같은 실수를 한다. 너무 강해서 매력 없는 주인공을 만든다.

‘블랙 위도우’

‘블랙 위도우’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마블의 영화들과 시리즈들을 생각해 보시라. ‘캡틴 마블’(2019), ‘블랙 위도우’(2021),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2022), ‘쉬 헐크’(2022), ‘미즈 마블’(2022), ‘더 마블스’(2023). 지나치게 남성 위주의 유니버스라는 비판 앞에 마블이 내놓은 결과물은 이 따위였다. 갈수록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여러 새 여성 캐릭터들을 모아서 새로운 어벤져스를 만든다는 계획도 사라졌다. DC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원더우먼’이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시리즈는 거기서 막을 내렸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할리우드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들마저 여성 액션 히어로 앞에서 얼어버린다는 것이다. 남성 히어로를 압도할 완벽한 히어로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완벽한 히어로는 재미가 없다.

‘쉬헐크’

‘쉬헐크’

남성 관객들도 완벽한 히어로를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다시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코만도’(1985)나 실베스타 스탤론 주연의 ‘람보 3’(1988) 속편을 만들려고 시도한다면 할리우드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만날 이혼당하고 교통 통제나 하다가 어이없이 사건에 말려들어 죽도록 고생하는 남자와 기억을 잃은 채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계속 싸워야만 하는 스파이의 시대를 거쳤다. 더는 압도적인 피지컬의 초인은 필요가 없다. 문제는 여성 액션 영화들, 특히 히어로 영화들이 구시대의 남성 액션 히어로들을 뒤늦게 소환하는 데 있다. ‘캡틴 마블’은 너무 압도적으로 강해서 아무런 서사가 없다. 액션을 펼칠 때의 쾌감도 없다. 어차피 이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액션 히어로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스티븐 시걸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슈퍼걸’도 같은 함정에 빠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1980년대의 사랑스러운 슈퍼걸과는 달라져야 한다. 2020년대의 진취적인 젊은 여성상을 담아야 한다. 액션에 있어서도 압도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슈퍼맨과는 조금 다른 뒤틀린 성격이어야 한다. 슈퍼맨 종족을 이민자 정체성으로 설정해 정치적 메시지도 담아야 한다. 이걸 다 해내려 지나치게 노력하자 그냥 ‘불량 소녀’가 나왔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는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하는 퓨리오사 캐릭터를 약한 여성들을 보호하려 하는 근사한 히어로로 만들어냈다. 굳이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주는 속편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2024)는 캐릭터에게 아무것도 더해주지 못했다. 전편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크게 실패한 이유다.

‘임성애 액션’ 자체가 나홍진의 장르로
‘원더우먼 1984’

‘원더우먼 1984’

문제는 메시지다. 남성 액션 캐릭터는 아무런 메시지 없이 그저 멋지게 보이기 위해 설계하는 사람들도 여성 캐릭터 앞에서는 뭔가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사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중요한 건 캐릭터다. 메시지가 아니다. ‘원더우먼 1984’(2020)는 전편의 거대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참패했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쾌감이 전혀 없는 액션이다. 속편 제작진은 원더우먼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히어로이므로 액션에 말려든 보통 사람들을 구해내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성 히어로와는 다르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탄생한 건 매번 누굴 구하려고 애쓰다 보니 느려지는 템포의 잔잔한 액션 장면들이다. 그냥 좀 시원하게 죽이면 안 되냐는 나쁜 생각을 가졌던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랬다.

나는 ‘호프’를 보면서 안심했다. 후반부 숲을 배경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조인성의 액션도 근사하긴 하지만, 정호연이 등장한 이후부터의 초반 1시간 액션은 압도적이었다. 내가 포스터 디자이너였다면 정호연이 처음 등장해 장총 쏘는 장면을 넣었을 것이다. 정호연이 연기하는 임성애는 이 영화의 가장 장르적인 캐릭터다. 나홍진 영화의 드문 여성이다. 사연이 없는 캐릭터다. 시원시원하다. 다른 캐릭터들이 생각을 할 때 그는 일단 행동한다. 차를 몰고 총을 쏘고 유탄을 발사한다. 육체적으로 힘이 필요할 땐 남성에 의지하지만, 장기인 총을 쏠 때는 남성들의 구원자가 된다. 캐릭터가 재밌으니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준 배우 정호연의 가능성도 시원하게 뻗는다.

생각해 보면 정호연 캐릭터는 여성이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홍진은 액션을 위한 캐릭터를 하나 만들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다. 남성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 여성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나홍진은 그냥 여배우를 캐스팅했다. 그러면서 디테일은 조금 바뀌었을 테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다. ‘더 마블스’와 ‘슈퍼걸’의 실패로 여성 액션 히어로 영화가 끝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망해가는 히어로 장르는 끝날 수도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영화에 대한 수요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그리고 많은 독자들 역시) 여전히 여성이 남성에게 킥을 날리는 영화를 보고 싶다. 사연과 메시지 없는 평범한 여성 액션 캐릭터가 보고 싶다. ‘호프 2’의 메인 포스터는 정호연이기를 바란다. 아니면 단독 캐릭터로 스핀오프라도 만들어 달라. ‘존 윅’ 스핀오프인 여성 액션 영화 ‘발레리나’도 나쁘지 않았다.

김도훈 영화평론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 주간지 〈씨네21〉 기자, 온라인 미디어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지냈다.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 합시다』 『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낯선 사람』 『나의 충동구매 연대기』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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