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하는 문진이 있다. 보통 어떤 형태든 책의 일부를 가리기에 실제 읽을 땐 치워 두기 일쑤다. 그런데 이 문진이 넓고 투명해 글씨를 읽는 데 지장이 없다면? 책장은 안정적으로 펼쳐지고 두 손은 자유로워진다. 거창한 혁신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써보면 “왜 이제야 나왔지?” 싶은 물건이다. 제품의 이름은 ‘북 온 북’. 말 그대로 책 위에 올리는 투명한 책이다. 일본 디자인 그룹 ‘텐트(TENT)’는 이런 사소한 불편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일상의 쓰임을 새롭게 정의해왔다.
5mm의 두꺼운 아크릴이 책을 누르면서 이 너머로 책의 내용을 읽을 수 있는 '북 온 북'. 넢은 투명도를 위해 일본 시즈오카 장인들이 마감을 한 제품이다. 사진 플레이스 1-3
일본에는 무인양품의 하라 켄야부터 디앤디파트먼트의 나카오카 겐메이처럼 디자인적 사고를 실생활에 접목한 디자인 거장들의 계보가 있다. 텐트는 이들의 다음 세대로 등장한 디자인 그룹이다. 2011년 제품 디자이너 하루타 마사유키와 올림푸스·소니 출신 디자이너 아오키 료사쿠가 결성, 제품 디자인을 넘어 브랜딩과 사용 경험까지 아우르고 있다. iF 디자인 어워드·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같은 세계적인 디자인 상도 꾸준히 받으며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지난달 12일부터 약 한 달간 이들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 종로구에 위치한 디자인 편집숍 플레이스 1-3에서 열린 ‘텐트’ 팝업이다. 전시 기간 여러 디자인 및 브랜드 업계 관계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단순히 디자인된 결과물을 나열한 게 아니라, 최초의 질문부터 개발 과정, 제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고민과 과정을 탐색할 수 있는 전시로 입소문이 나면서다. 전시를 기획한 나웅주 하이픈 대표는 “텐트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행동을 사려 깊게 관찰해 새로운 사용 경험을 제안하는 디자인 팀”이라고 소개했다.
플레이스 1-3에서 열린 텐트 팝업 현장. 약 한 달 동안 2000여 명이 방문했다. 큰 숫자는 아니지만 기획자와 마케터 사이에서 “제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고민과 과정을 탐색할 수 있는 전시”로 입소문이 났다. 사진 플레이스 1-3
인공지능(AI)이 제품을 만들고 자동화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사려 깊은 질문을 통해 인간 다운 물건을 만드는 디자이너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뭘까. 비크닉이 도쿄에서 활동하는 텐트 팀에게 좋은 물건은 어떻게 탄생하는지, 왜 지금 브랜드들이 이들의 철학을 주목하는지 물었다.
좋은 물건은 사소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 “도쿄의 텐트 직영 매장에서 디자인에는 관심 없어 보이던 할머니 한 분이 ‘프라이팬 주’를 써보시더니 극찬을 하면서 며칠 뒤 친구들 몇 분을 데려오셔서 추가로 구매해 가신 적이 있어요. 디자인에 조예가 깊은 분들께 공감받는 것도 디자이너로서 짜릿하고 기쁘지만, 주변 이웃 분들이 좋아해 줄 때 더 깊이 감동합니다. 일상의 도구로 인정받는 일이니까요.” "
프라이팬 주는 ‘만들기와 먹기를 함께 할 순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접시 겸용 프라이팬이다. 탈착 가능한 나무 손잡이를 제거하면 식탁 위에 그대로 올려두어도 손색없는 멋진 접시가 된다. 이 프라이팬 주는 출시 후 10만 개 이상 팔린 히트작이다. 이와 비슷하게 도마 위에서 음식을 썬 뒤 그대로 접시로 쓸 수 있는 ‘초 플레이트’는 2021년 공개 직후 하루 만에 1000건 넘는 예약이 몰리며 누적 22만 개가 팔렸다.
후지타금속의 의뢰로 제작한 '프라이팬 주'. 슬라이딩 한번으로 탈착 가능한 핸들과 요리와 식사의 경계를 허문 제품이다. 사진 TENT 홈페이지
이처럼 텐트의 디자인은 늘 일상의 작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코로나19 시절, ‘옷을 자주 세탁하는 것만큼 가방도 더 자주 세탁할 순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뒤집으면 그 자체가 세탁 망이 되는 백팩을 만들었다. 쉽게 지문이 묻는 스마트 기기의 액정을 자주 닦을 수 있는 도구를 생각하다 칠판지우개에서 영감을 얻은 디스플레이 지우개를 고안했다.
일본 디자인 그룹 텐트(TENT)의 아오키 료사쿠, 하루타 마사유키(왼쪽부터) 지금은 4인 체제로 운영 중이다. 이름에는 바람 잘 통하는 텐트처럼 유연하고 단단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사진 TENT
예쁘기보다 최적의 감각 찾는다
텐트는 제품을 구상할 때 모호한 ‘핵심 소비자’를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나 가족, 친구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갖고 싶어 할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내가 돈을 내고서라도 갖고 싶은가”를 스스로 묻고, 이 기준이 분명하면 원가나 비용도 장벽이 아니라 “얼마까지 낼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긍정적인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현실적 제약에 부딪혀 처음 구상과 완전히 달라진 형태로 완성되는 일도 잦지만, 이들은 이를 타협이 아니라 “더 나은 가치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과 하나를 깎아 먹는데 도마와 접시를 따로 꺼낼 필요 없으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초플레이트. 사진 플레이스 1-3 홈페이지
텐트가 말하는 좋은 디자인은 예쁜 물건이 아니다.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설명 없이도 편하다고 느끼게 하는 ‘최적의 감각’이다. 이들은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 주인공이고 도구는 이를 받쳐주는 조연”이라며 “물건 단독의 미학을 넘어 사용자의 태도와 환경을 아우르는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사용자의 최적 감각을 위해 수 없는 시제품 테스트는 물론이고 원하는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일본 장인의 손을 빌리기도 한다. 앞서 등장한 ‘북 온 북’은 아크릴의 투명도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완성하는 데 7년이나 걸렸다.
스마트폰과 전자기기 화면의 지문을 닦을 수 있는 칠판지우개 클리너와 투명한 아크릴 문진인 '북 온 북'. 사진 플레이스 1-3 홈페이지
“집요한 과정 축적될 때 매력 있는 브랜드 된다”
고급품과 저가품을 나누는 양극화 소비에 대해서도 텐트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고급과 저가를 나누는 시선은 결국 타인과의 비교, 외부의 평가 기준에서 출발한다”며 “남들이 정한 최고(最高)보다 나에게 맞는 최적(最適)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럭셔리도, 단순한 저가품도 아닌 “조금 독특하지만 사려 깊은 선택지”로서 각자의 최적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이들은 말한다.
텐트는 고객사의 디자인 의뢰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제품의 기획부터 제작, 브랜딩까지 직접 맡고 있다. 텐트는 브랜드를 “실적(결과물)에 기대감이 곱해져 완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눈길을 끄는 비주얼이나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진짜 힘은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집요한 과정의 축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완성도를 끝까지 다듬고, 양산 과정의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고, 완성품을 어떤 모습으로 전달할지 고민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브랜드의 매력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코로나 시절, ″옷뿐만 아니라 가방도 빨 수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개발한 '베일' 백팩. 안에는 정리 키트가 있어서 소지품을 섞이지 않게 보관할 수 있다. 사진 플레이스 1-3 홈페이지
많은 물건을 더 빨리 만들 수 있는 시대, AI가 디자인의 영역까지 넘보는 시대다. 그런데도 무엇을 만들고 왜 만들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 텐트는 말한다. 거창한 혁신 대신 사소한 불편 하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 팀의 태도가, 디자인에 관심 없던 할머니의 마음도 움직인 이유가 아닐까.
b.피셜
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