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휴전이 사실상 무너지면서 이란이 정치·민생·경제를 아우르는 복합 위기에 빠졌다. 최고지도자의 장기 잠행 속 강경파와 협상파의 권력투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군의 공습과 폭염에 의한 전력난까지 겹치자 국민의 불안이 커지면서다.
18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도심 이슬람혁명광장에서 한 여성이 오토바이들이 지나는 도로를 걷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란의 대표적인 강경 보수 정치세력인 파이다리전선 등 초강경파가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 등 지도부의 대미 협상 행보를 최고지도자의 권한을 잠식하는 ‘연성 쿠데타’로 의심하고 있다고 CNN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매체는 “모즈타바 하메네이(이란 최고지도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 갈리바프 의장과 그의 정치적 동맹들이 사실상 국정을 운영하게 됐다”며 “초강경파는 이를 최고지도자의 권력을 빼앗는 연성 쿠데타로 인식하고 있다”는 이란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강경파가 모즈타바에게 직접 접근하기 어려워지면서 누군가가 최고지도자를 외부와 차단하고 있다는 의심까지 커졌다는 것이다. 앞서 강경파 의원 마흐무드 나바비안은 지난 2일 X(옛 트위터)에 “이란 국민에게 경고한다.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글을 올렸다.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이란 전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장례 행력이 수도 테헤란의 아자디 광장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실제 지도부를 향한 강경파의 반감은 이달 초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식에서 공개적으로 분출됐다. 이란 반체제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에 따르면 당시 일부 조문객은 페제시키안 대통령을 향해 “타협자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압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에게도 “배신자에게 죽음을”, “부끄러운 줄 알라”는 구호가 쏟아졌다. 미국과의 휴전 협상을 이끈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갈리바프 의장, 아라그치 장관을 향한 초강경파의 적대감이 장례식장에서 표출된 것이다.
18일(현지시간) 이란 남부 루단과 반다르아바스를 잇는 도로의 교량이 미군 공습으로 크게 파손된 가운데 관계자들이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민생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미국의 공습과 폭염, 전력난이 겹치면서 주민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미국의 공습으로 이란 남부 호르모즈간주에서는 주요 교량과 전력시설이 공격받았고, 반다르아바스로 이어지는 교통망과 차바하르 항만 시설도 타격 대상이 됐다. 미국은 이들 시설이 이란혁명수비대(IRGC)의 군수물자 수송에 이용되는 군사 목표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란은 민간 기반시설까지 공격받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야간 공습이 반복되는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폭발음과 충격파에 시달리는 데다 정전과 물가 상승, 실업까지 겹치면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전했다.
미 중부사령부(CENTCOM)가 공개한 영상으로, 18일(현지시간) 미군의 공습을 받은 이란 내 한 지역에서 폭발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력난도 심화하고 있다. 이란 에너지부는 17일 전력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에는 한 시간이라도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주민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수도 테헤란의 낮 최고기온은 약 39도, 호르무즈해협에 인접한 남부 항구도시 반다르아바스는 약 41도까지 오르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절전 요청을 따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심각한 경제난을 버티기 위해 이란은 앞서 휴전 기간 원유 수출도 크게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이 이란산 원유에 대한 해상 봉쇄를 일시 해제한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이란이 약 70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고 보도했다. 금액으로는 50억~60억 달러(약 7조~9조원) 규모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오만 무산담반도에서 바라본 호르무즈해협을 선박들이 지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원유 대부분은 중국으로 향했다. 이란 유조선 약 20척은 말레이시아 인근 해역에서 다른 선박으로 원유를 옮겨 싣는 해상 환적 방식으로 제재 추적을 피한 뒤 중국의 독립계 정유업체에 판매한 것으로 분석됐다. 휴전 기간 확보한 원유 수입이 전쟁과 제재로 어려움을 겪는 이란 경제에 단기적인 버팀목이 된 셈이다.
조너선 패니코프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중동 전문가는 WSJ에 “이란 경제가 이슬람혁명 이후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어 모든 수입이 중요하다”며 “이란 정권이 확보한 자금을 미국과의 전쟁을 비롯한 전략적 목적에 우선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