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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 꺼지지 않는 韓생명력”…줄 매달고 망치 든 ‘아지매’ 정체 [피란수도 부산]

중앙일보

2026.07.19 13:00 2026.07.1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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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상인들. 한국전쟁 전후 생계를 위해 시장에 뛰어든 여성 상인들은 ‘자갈치 아지매’로 불리며 부산의 생활경제를 지탱했다.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ㆍ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1953년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상인들. 한국전쟁 전후 생계를 위해 시장에 뛰어든 여성 상인들은 ‘자갈치 아지매’로 불리며 부산의 생활경제를 지탱했다. 사진 한국저작권위원회ㆍ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부산에는 ‘3대 아지매(아줌마)’가 있다. 자갈치·재첩국·깡깡이 아지매가 그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라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남성을 대신해 삶의 최전선에서 가족을 먹여 살린 피란수도, 부산 시절 대표적인 여성들이다.


이 중 자갈치 아지매는 부산이 피란수도였던 시기 국제시장·부평(깡통)시장과 함께 부산 3대 시장이었던 자갈치시장에서 비롯됐다. 자갈치 시장은 19세기 말 부산항 개항 이후 중구 남포동 주변 바닷가 자갈밭에 늘어선 노점상이 시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전국에서 밀려든 피란민들이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난전과 행상으로 수산물을 팔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커졌다. 그때 자갈치 아지매들은 머리에 이고 온 수산물 등을 좌판과 노점에 올려두고 비바람 등 갖은 악천후 속에서도 고래고래 소지를 지르며 손님을 불러 세웠다. 그 우렁찬 목소리는 전쟁이라는 절망의 시대를 버텨내게 한 위대한 생명력을 담고 있었다.


자갈치 시장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국제·부평시장도 북적이는 인파와 흥정 소리로 생명력이 가득했다. 원래 패망 후 떠난 일본인들의 물건이 거래됐던 국제시장은 전쟁 시기 원조 물자와 구호물자, 피란민들이 가지고 온 각종 물품이 거래됐다.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문을 연 부평시장은 미군부대 등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제품이 주로 거래되면서 '부평깡통시장'이라고 불렸다. 이들 시장에서 외치던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는 목소리는 오늘날 이들 시장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재첩국이 담긴 금속 동이를 머리에 이고 장사에 나선 부산의 재첩국 아지매들. 사진 부산 사하구

재첩국이 담긴 금속 동이를 머리에 이고 장사에 나선 부산의 재첩국 아지매들. 사진 부산 사하구

낙동강 재첩을 끓여 장터 등에서 팔던 것은 조선 후기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끊인 재첩국을 양동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직접 손님을 찾아 나서는 ‘행상’ 형태가 본격화된 것은 피란수도 부산 시기부터다. 화가 백영수의 ‘장에 가는 길’(1953년) 등에도 나오는 ‘재첩국 아지매’의 등장이다. 이후 1960~70년대 부산 사상구의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기수역(汽水域)에 있던 엄궁·감전·삼락 지역에서 밤새 끓인 재첩을 양철 양동이에 이고 버스를 타고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재첩국 사이소~”를 외쳐 잠들었던 부산의 새벽을 깨웠던 것도 이들이었다.


부산 중구 남포동과 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영도대교(214.7m). 이곳에서 차를 타고 영도로 들어가며 오른쪽에 1912년 목선 등을 제조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있던 ‘깡깡이 마을’(대평동)이 보인다. 조선소에서 배를 수리할 때 망치로 때리는 소리가 마을 별칭이 된 곳이다. 배에 그네 같은 줄을 매달고 앉아 망치로 녹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던 아지매가 바로 ‘깡깡이 아지매’다.

그네줄에 매달려 배 녹을 제거하는 ‘깡깡이 아지매’들의 모습. 사진 깡깡이마을 박물관 ·최민식

그네줄에 매달려 배 녹을 제거하는 ‘깡깡이 아지매’들의 모습. 사진 깡깡이마을 박물관 ·최민식

부산 영도구 대평동 한 아파트에 그려진 깡깡이 아지매 모습. 위성욱 기자

부산 영도구 대평동 한 아파트에 그려진 깡깡이 아지매 모습. 위성욱 기자


시초는 일제강점기부터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영도(대평동·남항동)로 많이 유입됐는데 이때 많은 여성 피란민들이 남편을 잃거나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진 상태에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 일을 하면서 깡깡이 아지매의 수가 크게 늘었다. 영도 봉래동은 1937년 한국 최초의 독(Dock·배를 만드는 작업장)이 있는 조선중공업주식회사(광복 후 대한조선공사→1990년 한진중공업)가 있었다. 사실상 영도는 대한민국 조선 산업 발상지이면서 1960~70년대 초반까지 대표적 조선산업 기지역할을 했다. 1911년 발행된 ‘부산시가전도’를 보면 대평동과 봉래동에는 영도와 부산 내륙을 잇는 ‘도선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부산시 건축자산 연구원 홍순연 박사(건축학)는 “부산의 3대 아지매는 피란수도 부산 시절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한국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며 “한국전쟁 시기에도 항구와 시장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이어진 이런 생명력이 바로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끈 원동력이다”고 말했다.



위성욱.김민주.이은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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