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왕’으로 불리는 영국 집권 노동당 앤디 버넘 대표(56)가 20일(현지시간) 제59대 영국 총리로 공식 취임한다.
버넘 대표는 키어 스타머 전 총리에 이어 2024년 7월 총선으로 집권한 노동당 정부의 두 번째 총리가 된다. 21세기 노동당 출신 총리로는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스타머에 이어 네 번째다. 2016년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부터 치면 일곱 번째, 2016년 7월 이후 10년간으로는 여섯 번째 총리다.
사전 공개된 취임 연설 요약본에 따르면 버넘 대표는 “10년 새 다우닝가에 들어서는 여섯 번째 총리가 된 점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안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정치의 필요성 및 희망과 통합의 메시지를 밝힐 예정이다. 또 “영국이 직면한 도전을 솔직히 인정하고 효율적 정부로서 전 세계에서 인정받으며 국민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도록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버넘 대표는 지난 17일 열린 노동당 특별 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되며 차기 총리로 확정됐다. 그는 지난달 18일 스타머 전 총리를 향한 사퇴 압박이 거세던 가운데 치러진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노동당 대표 경선에 단독 출마해 대표직을 거머쥐었다. 보궐선거 당선 이후 약 한 달 만에 총리직에 오르는 초고속 행보다.
지난 17일 대표로 선출된 버넘이 박수를 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는 대표 취임 연설에서 ‘선명한 노동당(Distinctively Labour)’을 새 비전으로 제시하며 경제 개혁과 재산업화, 공공 부문의 역할 확대, 지방 분권을 핵심 국정 과제로 내세웠다. 수도·교통 등 핵심 인프라에 대한 공공 통제를 강화해 노동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기업친화적인 정책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스타머 체제에서의 노동당이 중도 실용주의를 앞세우며 고유의 색채를 잃었다는 당내 좌파 진영의 비판을 의식한 행보다.
지방 분권과 균형 발전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맨체스터에 제2 총리실 역할을 하는 ‘북부 총리실(No. 10 North)’을 설치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그는 대표 취임 당시 “모든 우편번호(지역 곳곳)에서 성장을 촉진하고 지역사회에 권력을 되돌려주는 국정 비전을 펼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리버풀 교외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버넘은 15세 때 노동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의회 연구원과 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험을 쌓았다. 이후 2001년 31세의 나이로 처음 하원에 입성해 17년간 의원직을 수행했다.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문화부·보건부 장관과 재무부 수석 부장관, 내무부·보건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내각에서의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지난 17일 버넘 대표가 영국 그레이브센드 타운 피어를 방문해 지역 관계자 및 당 지지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 셀카를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그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으로서 성공을 거둔 이후다. 2010년과 2015년 노동당 대표 경선에 각각 출마했지만 에드 밀리밴드와 제러미 코빈에게 패한 그는 2017년 신설된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 선거에 출마해 63.4%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후 2021년 67.3%, 2024년 63.4%의 득표율로 잇달아 승리하며 3선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명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 속 인물에 빗댄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영국 북부는 런던 중심의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됐다는 인식이 강한데, 버넘이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드라마 속 인물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10월 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지도자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보리스 존슨 당시 영국 총리가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보리스 존슨 정부에 맞서며 주목을 받았다. 보리스 존슨 당시 총리가 충분한 재정 지원 없이 맨체스터 지역에 최고 수준의 봉쇄 조치를 시행하려 하자 버넘은 정부가 제시한 보상안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런던 엘리트들이 북부 노동자들의 생계를 희생시키려 한다. 북부를 거지 취급하지 말라”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버넘 대표는 지방정부에 더 큰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맨체스터리즘(Manchesterism)’을 꾸준히 주창해왔다. 기업 친화적인 성장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주택, 교통, 공공 인프라, 교육 등 주민 생활과 직결된 정책 결정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해 지역 특성에 맞는 경제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는 구상이다. 그의 재임 기간 그레이터 맨체스터는 전국 평균을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대중교통 체계 개편과 주택 공급 확대 등 도시 경쟁력 강화 정책도 본격 추진됐다.
다만 현재 버넘 대표 앞에 놓인 정치·경제적 환경은 녹록지 않다. 그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강경 보수 성향 영국개혁당의 부상으로 심화한 정치 양극화와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 불신, 악화한 공공 재정, 경제 성장 둔화 등 복합적인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경제 회복과 물가 안정, 공공서비스 개선, 사회 통합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버넘이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성하며 느끼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며 “취임 직후부터 각종 요구가 쏟아질 것이고 가장 논쟁적인 현안들에 대해 즉각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전망했다.